교리실

삼위일체

마가렛나라 2008. 4. 19. 00:28

1. 삼위일체는 신앙의 신비이다
복되신 삼위일체의 신비는 곧 하느님 자신에 관한 신비이다.

이 신비가 다른 많은 신앙의 교의를 알아듣게 하는 빛이 되며

또 그 많은 계시진리가 이 신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신비야 말로 신앙의 진리들의 계층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고 본질적인 교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는 명을 내리실 때에, 그분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가르치셨다.

"너희는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

그러므로 아타나시오 신경에서는 이렇게 삼위일체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삼위로 계신 한 분 하느님을 예배하며, 일체로 계신 삼위를 예배하나이다.

성령도 구별되는 한 위격이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신성을 가지시며

동등한 영광과 똑같은 위엄을 가지시느니라."

이처럼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한 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아울러

영원으로부터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시면서 구별되는 세 위가 계심을 믿는 것이다.

유일한 하느님, 유일한 신성이 계시다고 하는 말은 신적 존재가 다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원천이요 목표는 오직 한 '지혜' 한 '사람' 한 '생명'이

계실 뿐인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구분되는 세 위이지만 무한하신 한 지혜

로 우리를 아시고 영원하신 한 사랑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은총을 통해서 우

리는 삼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질수 있다.

이렇게 볼때 삼위일체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하느님

께 감추어져 있어서 신적으로 계시되지 않으면 알려질 수 없었던 신비들 가운데

하나 이다. 계시 진리의 어떤 것은 이성의 탐구의 대상이 되고 이성에 의해서 발

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같은 신비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써만 이해

될 수 있는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2.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하느님
구세사의 시초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온전하고 확실하게 계시되지 않았

었다. 하느님은 단계적으로 당신께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다. 구악성서

에도 이 진리의 예표들이 있지만, 삼위일체의 신비가 정식으로 계시되지는 않았다.

이 신비가 계시된 것은 신약성서 이다. 성자와 성령이 알려지고, 그분들이 하느님

이시며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들이심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느님은 한 분

뿐이라는 진리를 견지 하면서도, 이 진리들을 명확하게 종합하는 데는, 여러 세대

를 거쳐 기도와 반성,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했다.


1) 구약성서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하느님
삼위일체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모르고 있었다. 기원전 1850년경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여러신을 믿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정하시고 자신을 밝히시기 시작하신다. 에집트의 노예 생활

에서 해방시켜 준 후 40년간 광야에서 인류사적 실생활을 통하여 교육하시고, 시

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기

적과 말을 들려 주시며, 당신은 전능의 하느님,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신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출애 20,2-3).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시는 분

으로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고 다른 어떤 신과도

비교할수 없는 강하신 신으로 "우리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이

제 알아라 내가 바로 그다. 나 외에는 신이 없다"(신명 6,4; 32,39)라고 말씀하여

주신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감추어졌던 자신을 조금씩 드러

내신다. 그러나 구약성서 안에서는 세 위에 대한 정확한 구분은 없고 다만 세 위

들이 계시다는 것을 희미하게 암시하여주는 귀절들이 몇 있다. 교부들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복수명사(엘로힘)가 자주 쓰였다는 점과 하나이신 하느님께 복수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창세 1,26) 하느님의 이름과 속성을 세 번 거듭 부르는 일(신명

6,4)등이 이 세위를 암시하는 속성으로 이해하였다. 신성 안에 어떤 구분이 있다고

시사하는 특정한 이름이나 칭호들은 더욱 그러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면 잠언

8,22 이하나 지혜서 7장 이하에서는 하느님을 일컬어 '지혜'니 '영'이니 하는 칭

호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세 남자들의 방문(창세 18,1-16)

이나 이사야서에서 세라핌이 '거룩하시다'로써 세 번이나 찬미하는 장면(이사 6,3)

등을 삼위일체의 사전 계시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신빙성이 약하

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하느님
신약성서도 체계적으로 정립된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교리를 명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내밀한 본성

의 계시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여기서 체험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거론되는 하느님은 구약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으로서 한 아들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을 부여하는 하느님을 뜻한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

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울러 증언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현

존'(마태 12,28)이며, 구약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선포된 율법을 능가하는 전권의 소

유자이고(마르 2,23-28; 3,1-8),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시다(루가 4,18). 이와같이 예

수 그리스도(성자)와 성령이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증언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고(요한

14,16.20; 15,26; 17,3; 갈라 4,6)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각기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

다.(마태 11,27; 요한 1,1; 8,38; 10,38; 15,26) 이를테면 나자렛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성부)의 현존이면서도 성부 자신은 아니다. 또 성령도 하느님(성부)의 자기

전달이지만, 하느님(성부)과 구별된다. 이와같은 점들을 통하여 볼때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하느님 단일성과 구별성을 모호하게 알고 있다. 그러

면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단순히 하느님과 조물 사이의 중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이 배열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성서 귀절에서 잘 나타

나고 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

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위로 올라 오실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

으로 당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마르1:9-11).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시며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

로 확인 되신 분이다"(로마1:3-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에게 누리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

의 성령이 오시면 구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

 

3. 삼위일체교리
삼위일체 교리는 절대 신비로써 실증적 계시와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이성에 의해서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절대 신비가 있다면

이 삼위일체 신비이고 가장 기본적인 신비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서 존재하는데 위격들은 하느님 본질이며, 하나

의 하느님 실체 이다. 이 세 위격들은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

하시다.

2) 그런데 이 세 위격들은 서로 구별 된다.

성부는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하였다. 성

령은 출산되지 않고 하나의 유일 원리로서의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된다.

3) 하느님 안에는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가 있으며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과의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하느님의 위격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

4) 하느님의 관계적 위격들은 하느님의 본질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아서 이 본

질과 함께 하나의 삼위일체를 구성하지 않다. 하느님 안에서는 상반되는 관

계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 각 신적 위격은 전적으로 하나이

기에 세 위격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시다.

 


4.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 만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3-26).


이와같이 성부는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초자연적인 생명을 얻게 하

시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생명을 받아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이며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셔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변모 되기까지 영혼의 성화

를 완수하신다. 이처럼 성령은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생활의 완성을 향해

부르고 있으며, 이 완성이 곧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이룬다.

우리는 현세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머리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파

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형언 하는데 사용되는

인간 언어가 하느님께 관한 숭고한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미비하다. 그러나

기도에 정진하고 묵상과 사랑을 익혀가면, 우리도 영원하신 성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거처하는 성령께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커져 가리라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목표는 복되신 성삼위를 알게 되는데에 있다. 성삼

위의 하느님이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관해서 아는 것이

다. 그래서 지혜와 사랑으로 엮어지는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에 우리도 한 몫끼게

되는 것이다(1요한3:2).

 

5.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하느님 안에는 모든 것이 완전한 상태로 있다. 그런데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발

산된 두번째 위가 있는데 그분은 신성한 말씀이시다. 그리고 완전한 이 실체들의

상호적인 사랑으로부터 세번째 위가 태어나는데 이 위는 사랑 혹은 성령이라고 불

린다. 그것은 처음의 두 근원, 즉 첫번째 위와 두번째 위로부터 발산되기 때문이

다. 이 사랑이 두 위로부터 발산되고, 그 위가 서로를 알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

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랑이 완전하고 무한한 두 근원으로부터 발산되므

로 성령 역시 성부, 성자와 같이 영원하고 무한한다. 또한 무한하신 하느님은 당신

자신이 파괴되거나 감소되지 않은채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두 위에게 다 주

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한한 근원이시고 또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에 당

신 자신은 아무 것도 잃지 않으신 채 당신 스스로 가지신 모든 것을 전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서로가 사랑 안에서 연결되어 있기에 우

리도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서 우리들이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나눌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6.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증거자 성녀 체칠리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나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

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인가를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과 나

와의 관계가 서로간의 믿음과 신뢰로 가득찬 사랑의 관계인가? 아니면 그냥 덤덤

한 관계인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음악의 주보 성인인 성녀 체칠리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성녀는 로마의 명문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결

혼을 포기하고 동정서약을 했다. 그런 것도 모르는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한 귀

족가문의 청년과 결혼시켰다. 결혼식날 그녀는 자신은 이미 하느님께 동정을 봉헌

했노라며 남편도 하느님을 알게 되기를 청하였다. 남편은 처음에는 하느님께 대한

관심이 없다가 체칠리아의 끊임없는 간구로 결국 열심한 신앙인이 되었고 전교에

힘썼다. 이러한 사정을 안 로마 황제는 그를 체포하였고 체칠리아는 자기 집에서

사형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흔히 사형수에게 적용하는 방법인 목욕탕에 가

두어 쪄서 죽이는 가혹한 처형법을 사용하였다. 체칠리아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목욕실에 가두어 진지 24시간이 경과 했으나 죽지 않자 다시 목을 베어 죽이기로

결정 하였다. 그러나 형리의 서툰 솜씨로 목을 베인 후에도 체칠리아는 수시간 동

안 고통을 겪었고, 마침내 한떨기 백합화로 하느님께 바쳐 졌다. 여기서 감탄할 사

실이 하나 있다. 즉 그런 고통속에서도 바른쪽 손가락 세개와 왼손 엄지 손가락을

내 보이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그 일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고 한다. 이처럼 체칠리아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목숨을

바쳐 가면서 까지도 하느님을 증거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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