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큉, "믿나이다"(현대인을 위한 사도신경 해설)에서...
성령: 교회, 성인들의 통공, 죄의 용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하느님의 아들에 관해 말하기는 더 어려웠다. 그러나 포착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물론 그림으로 나타낼 수도 없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에 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1. 영신화된 그림
서양미술사에 다른 화가들보다 훨씬 강렬한 영신화靈神化에의 열망을 지녔던 한 화가가 있다. 그의 많은 그림들이 몰아적 감동으로 빛나고 있다. 그가 그린 공간은 사실적이기보다는 흔히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수직성, 위로 향하려 애쓰는 움직임이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물들은 의도적으로 신장을 늘리어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명암 구사도 매우 극적이다. 윤곽은 가물거린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인물들의 표정 풍부한 눈을 제외하고, 탈脫 영상화되어 있다.
이 화가는 그리스. 비잔틴 예술 세계 출신이지만,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티치안Tizian, 틴토렌토Tintoretto 등의 대가로부터 르네상스의 기교와 성과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을 스페인 민중에게 친근한 신비적 종교심과 결합시켰다. 그 자신 스페인 사람이 아니나, 스페인 사람보다 더 스페인 사람다웠다: 엘 그레꼬 El Greco(1541-1614)라 불리는 크레타 출신의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 그는 화가일 뿐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그리고 미술이론가였다.
작품 완성을 위해 갈수록 아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마지막 창작 시기에, 70세를 눈앞에 둔 무르익은 이 예술가는, 성탄이나 성금요일 또는 부활과 비교할 때, 서양 회화에서 매우 드물게만 찾아볼 수 있던 주제, 곧 성령강림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수직적으로 위를 향해 치솟으려는 이 그림(지금 마드리드의 프라도Prado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에서 우리는 탈사실적 무대장치의 녹회색 배경 앞에 성령에 사로잡힌 일군의 사람들(두 여자와 열두 남자)을 볼 수 있다.
얼굴 표정과 몸짓에서 읽을 수 있는 강렬한 흥분이 그들을 움켜쥐고 있다. 몇은 손을 높이 뻗고, 몇은 목을 위로 향하며, 몇은 신비에 붙들려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윗부분의 열 사람은, 그리스.비잔틴 회화에서처럼, 똑같은 높이로 그려져 있고, 아랫부분에 비스듬히 배치된 인물들은 놀라서 뒤로 물러나 있다. 인물들의 짙은 색(녹색.노랑색.빨강색.고동색) 옷이 위로부터 오는 빛을 받고 있다.
각각의 인물들 위에는, 그들을 뚜렷이 드러내고 격동과 환희로 가득 차게 만드는 하나씩의 작고 빛나는 불꽃 혀가 떠돌고 있다. 이 매우 극적인 그림은 거의 표현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대담함을 지니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이 있고 탈물질적이며 영신화되어 있다.
성령 자신을 맨 위에,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신적인 광휘 안에, 예수 세례 이야기를 좇아 이미 일찍부터 성령강림 묘사에 사용된 비둘기 상징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 비둘기 상징은 중세 초기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16/17세기 바로 엘 그레꼬 시대 이래 다시금 널리 쓰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거듭 새삼, 요한 복음서의 진술들과 연계하여, 성령을 한 인격처럼 '위로자'로 말하지 않는가? 성령은 적어도 중세 미술에서는 흔히 곧바로 인간적 모습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중세 미술에서 성령은 흔히 성부, 성자와 함께 닮은 세 인간적 모습(말하자면 세 천사나 신들!)으로 묘사되며, 그중 셋째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또는 아주 반대로, 13세기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까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성을 흔히 머리나 얼굴 셋을 가진 한 형상(말하자면 세 양식을 지닌 한 신!)으로 묘사했다. 아무튼 삼신설三神說과 양식설 둘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을까?
듣고 놀랄 일: 위의 두가지 표현을 교종들은 금지했다. 이미 1628년 우르바노 8세는 너무나 인간적인 이 삼위일체 상징들을 금지했고, 계몽된 베네딕도 14세(1745) 이래 성령은 오직 비둘기 모습으로만 묘사되어야 했다. 우리 세기의 1928년에도 로마의 검사성성(오늘날의 신앙교리성)은 그 결정을 엄수할 것을 새삼 명령했다. 이래서 절실한 근본적인 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