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실

창조와 구원 역사에서 사랑의 일치

마가렛나라 2008. 4. 19. 01:33

창조와 구원 역사에서 사랑의 일치
 
                                   심상태 /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의 제1부는 “창조와 구원 역사에서 사랑의 일치” 제명 하에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짧게 밝히고 나서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베풀어지는 선물로서의 사랑의 본질적 요소를 구명하는 가운데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깊은 통찰력으로 감명 깊게 제시하고 있다.

‘사랑’의 언어 문제
교황께서는 우선 ‘오늘날 가장 자주 사용되고 전혀 다른 의미로 오용되고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 ‘사랑’이 지니는 ‘언어의 문제’를 짚으신다(2).
‘사랑’은 일상적으로 조국, 직업, 일에 대한 사랑, 친구 간, 부모와 자식 간, 가족간의 사랑, 그리고 이웃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등 폭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교황께서 사랑의 다양한 의미 가운데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각별히 대하심은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일이다. “이 사랑 안에서 나뉠 수 없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고, 마다할 수 없는 행복에 대한 약속이 인간에게 드러납니다. 이는 뛰어난 사랑의 원형처럼 보여, 다른 온갖 사랑은 그와 비교할 때 빛을 잃어버리는 듯합니다.”

‘에로스’와 ‘아가페’ - 차이와 일치
사랑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을 지니면서도 본래 하나의 실재임이, 사랑을 뜻하는 각기 다른 그리스어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 단어들의 의미가 밝혀짐으로써 제시된다(3-8).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오지 않고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에로스’로 대하였는데, 구약에서는 이 말이 단 두 번 사용되고 신약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교황께서는 본시 ‘우애’ 내지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가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심화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교가 에로스 대신 아가페라는 말로 사랑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드러내고자 하였다고 밝히신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역사 안에서 ‘에로스’를 독살하다시피 부정하게 대함으로써 점차 악한 것으로 변질시켰다고 주장하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판에 대해서, 교황께서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육체에 적대적 경향이 언제나 있어 온 것은 사실’임을 시인하신다. 하지만 즉시,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본시 ‘에로스’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정화하고 성숙시켜 상승케 하는 ‘아가페’(카리타스)라고 해명하신다(3).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로스’를 이성( �g)을 압도하는 ‘비이성적 갈망’으로 보았다. 에로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조종이 가능하지 않고 돌출하는 본능적인 원초적 힘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지고의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신적인 광기’로 파악되었다. 교황께서는 고대 종교 신전에서 횡행하였던 ‘신성한’ 매춘의 예를 통해 에로스가 신과 사귀는 신적 힘으로 찬양되었음을 지적하시면서 구약 성경이 왜곡되고 파괴적 형태의 에로스를 물리치고자 하였지만, 에로스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신다. 에로스 개념 안에 사랑과 신적 존재 사이에 연관성이 있고, 사랑이 인간의 일상적 삶보다 위대하고 다른 무한과 영원을 약속하는 데, 본능적 에로스를 충동적으로 따름으로써가 아니라 아가페를 통한 정화와 성숙을 필요로 한다. 아가페를 통한 에로스의 정화 요청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의 합일 존재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긴밀히 일치될 때에 진정 그 자신이 됩니다.… 인간이 순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기만을 갈망하고 육체를 단지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려 한다면, 영혼과 육체 모두 그 존엄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영혼을 거부하고 물질, 곧 육체를 유일한 실재로 여긴다면, 마찬가지로 인간은 위대함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통합된 피조물, 곧 인간인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두 차원이 진정으로 일치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온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사랑, 곧 에로스는 성숙하여 그 진정한 위대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4)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인간은 정신과 물질이 하나로 융합되어 새로운 고귀함에 이르게 되는데, 에로스가 ‘황홀경’의 상태에서 신에게로 올라가고, 인간 자신을 초월하게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상승과 극기, 정화, 치유의 길이 요구되는 것이다.
교황께서는 구약 성경의 아가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 다른 히브리어, ‘에로스’에 해당하는 ‘도딤’(dodim)과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 비슷한 발음의 ‘아가페’로 번역된 ‘아하바’(ahabi)가  대조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제시하신다. 후자는 “‘찾아 헤매는’ 불확실한 사랑과 대조적으로, 이기적 성격을 뛰어넘어 다른 이를 참되게 발견하는 사랑의 체험을 드러냅니다. 사랑은 이제 다른 이를 염려하고 배려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은 포기가 됩니다. 사랑은 희생하겠다는 각오이고, 바로 그 희생을 찾는 것입니다.”(6) 그분은 내적으로 정화된 사랑이 영원을 바라보는 궁극적 사랑이 되고자 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적시하신다. “사랑은 영원을 바라봅니다. 사랑은 참으로 ‘황홀경’입니다. 도취 순간의 황홀경이 아니라, 자기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줌으로써 자아를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참으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여정인 황홀경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사랑의 길이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가 17,33) 교황께서는 이 말씀에서 사랑의 본질과 인생의 보편적 본질이 밝혀진다고 보신다.
‘세속적인’ ‘올라가는’ 사랑으로서의 에로스와 ‘신앙 안에 뿌리를 박고 신앙으로 형성되는 ’내려오는‘ 사랑으로서의 아가페가 대비되는 일이 자주 생겼으며, 철학적 신학적 토론에서 에로스는 비그리스도교, 특히 그리스 문화의 전형으로, 반면에 아가페는 그리스도교의 전형으로 극단적 형태로 대비되고는 하였다. 교황께서는 이러한 관점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인간 삶의 근본적 핵심 관계들과 단절되어 비현실적 세계로 만들 우려가 없지 않다고 판단하신다. 에로스와 아가페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사랑의 동일한 실재 안에서 올바르게 일치할 때에 사랑의 참된 본성이 잘 실현될 수 있다고 보신다. “에로스가 처음에는 커다란 행복을 약속하는 매혹으로서 탐욕적이고 올라가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더욱더 추구하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을 점점 더 염려하고, 자신을 내어주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가페의 요소가 이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7) 인간이 사랑을 주고 싶어 하여도, 사랑을 선물로 받기도 하여야 하는 데,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나오는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의 샘물을 끊임없이 받아 마시면서 자신이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는 샘이 될 수 있다(요한 7,37-38; 19,34).
교황께서는 야곱의 사다리 이야기(창세 28,12; 요한 1,51)와 관련된 교부들의 해석을 원용하시며 교황 대 그레고리오가 사목 규칙에서 제시한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소개하시는데, 신자들 모두 마음 깊이 사겨둘 말씀이다. “착한 목자는 관상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떠안고, 그 요구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모세와 관련해서 인용되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말씀 역시 사목자들과 사회복지 관계자들이 두고두고 음미할만한 의미를 담고 있다. “안에서는 관상으로 드높여지지만, 밖에서는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한다.”(7)

성경 신앙이 지닌 새로움
9-11항은 성경 신앙이 지니는 새로움의 내용을 다룬다.
성경의 세계는 주변 문화의 불명확하고 모순을 자아내는 하는 신들과는 달리 우주 전체를 창조적 말씀으로 존재케 하시고, 소중한 피조물 중에서 인간을 에로스이면서 아가페 사랑으로 대하시는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을 증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분명히 에로스라 할 수 있지만, 또한 전적으로 아가페이기도 합니다.”(9) 하느님의 사랑은 거저 베풀어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랑이기에 에로스이자 전적으로 아가페이기도 하다. “당신 백성에 대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열정적인 사랑은 동시에 용서하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 사랑은 너무도 위대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스르시고, 그분의 사랑이 그분의 정의를 거스르게 합니다.” 창조의 보편 원리, 제1 이성인 로고스는 동시에 참 사랑의 모든 열정으로 사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구약의 아가는, 인간이 원초적 꿈인 인격적인 하느님과 사랑을 창조하는 결합에 이를 수 있음을 증언한다. “그 일치 안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으로, 인간으로 남아 있지만,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하듯이,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10)
교황께서는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먼저, 에로스는 인간의 본성 자체에 뿌리박고 있으며, 두 번째로 에로스가 인간을 혼인으로, 곧 유일하고 결정적인 유대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적시하심으로써 에로스의 긍정적 성격을 시사하신다. 그래서 결정적 사랑에 토대를 둔 혼인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상이 되고, 반대로 그 관계가 혼인의 표상도 된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은 인간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11)

예수 그리스도 - 강생하신 하느님의 사랑
12-15항은 신약 성경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새로움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명시적으로 증언한다.
구약 성경에서 예측할 수 없이 발생하는 전례 없는 하느님의 활동에서 새로움이 드러나는데, 신약 성경 안에서 고통 받는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한층 더 극적인 모습으로 새로움을 드러내신다. “그분의 십자가 위 죽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슬러, 인간을 들어 높이시고 구원해 주시고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행위의 절정입니다. 그것은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입니다.”(12) 예수께서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바치는 행위가 영원히 현존하게 하신다. 이 성체성사는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는 예수님의 행위에 인간을 끌어들여 하느님과 결합하는 데로 이끈다. 성체성사의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다른 모든 신비주의적 고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인간을 들어 높여 준다.
교황께서 성체성사가 사회적 특성을 지녀서, 성찬례는 ‘아가페’로 불리는 의미를 밝혀주시는 말씀도 그리스도인 누구나 마음 깊이 새겨둘만한 가치를 지닌다. “성찬의 친교인 ‘예배’ 자체 안에는 사랑받는다는 사실과 그에 이어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14) 그분은 당신 자신을 가난하고 굶주리며,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과 나그네들과 동일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 안에서 만나는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음(마태 25,4)을 지적하시며, 여기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가 된 사실을 강조하신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16-18항에서 사랑의 본질과 성경의 신앙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의미 고찰에 입각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가 좀 더 명료하게 밝혀진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교황께서는 이 구절을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길이며,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심으로써 두 사랑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강조하신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시고 당신 자신을 주 예수님으로 드러내셨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창조 이래,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이래 여러 방식으로, 이를테면, 성사, 특히 성체 성사, 전례, 교회의 기도, 살아 있는 신자 공동체 등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체험토록 하신다. 이러한 만남을 진전시켜 나갈 때, 사랑이 단순히 감정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모든 잠재력을 불러일으킨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면, 의지와 사고의 공유에 이르듯이,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의 경우에도 사고와 감정의 일치 안에서 의지의 일치가 자라나,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가 점점 더 일치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느님의 의지가 외부에서 강요되는 낯선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 자신보다 더 깊이 자신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인간 자신의 의지가 된다.
이웃 사랑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방식으로 가능하게 드러난다. 하느님과의 내밀한 만남이 의지의 친교가 되어 인간 감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이웃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경우를 성인들, 칼카타의 마더 테레사 복자에게서 만날 수 있다. “사랑은 사랑을 통하여 자랍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기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치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은 우리의 분열을 뛰어넘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 바로 ‘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18)
   이처럼 이 회칙 제1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사랑, 아가페가 신자들을 현실 도피적이고 은둔적 삶 안에서 ‘황홀경’에 빠지게 하지 않고, 모든 인간과 사회와 세상을 포용하는 참 보편적 사랑임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신자 모두, 특히 사목자들과 사회복지 관계자들은 일상 속에서 이 아가페 사랑의 깊고 넓은 의미를 늘 반추하며 생활하도록 요청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끝.

 

P.S: 요청에 따라 은행 계좌와 함께 주민등록번호도 알려드립니다.
은행계좌 번호: 국민은행 031-24-0004-791 심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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