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의 가르침을 담은 고대 문헌들을 보면 다양한 신화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원래부터 신과 세상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흔히 '신의 세계'(플레로마)와 '물질의 세계(힐레)로 구분된다.
여기에 다양한 이유로 인해 세상에 질서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신의 세계로부터 '빛(포스)'이 나와 물질의 세계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질료'와 '빛'이 합쳐지면서 비로소 질서를 지닌 '현상적인 세상'(코스모스)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빛'이 단지 세상 질서를 구축하는 일에 기여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세상에 계속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그만 '빛'이 '질료'안에 갇히고 만다.
다음 단계로 구원의 드라마가 펼쳐지게 된다.
신의 세계에서 천상의 구원자(혹은, 중간적인 존재)가 세상으로 내려와 신의 세계에 관한 '지식'(그노시스)을 세상에 알려주고 그로 인해 '질료'에 갇혀있던 '빛'이 자유로워져서 하늘에 있는 신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신화들에 다양하게 표현된 모습들을 보고, 일견 영지주의는 상당히 복잡한 사상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심층에 서 있는 논리는 의외로 간단한데, 바로 이원론이다.
이원론은 삼라만상의 질서를 둘로 갈라서 파악하는 세계 이해이다.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이승이 있으면 저승이 있고, 육이 있으면 영이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본다면 이원론이란 비단 헬라 세계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인 세계이해라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영지주의의 이원론이 갖는 실제적인 특징은 두개의 상반된 모습을 고정된 질서로 간주하는 데 있다.
그저 하늘은 하늘이고 세상은 세상이라 둘이 합쳐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
영원히 만나지 않는 기차 길처럼 말이다.
그처럼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우주를 이해하는 하나의 설명 체계일 뿐 '음양합일', '신인합일', '종말론' 등의 목적 지향적인 이원론이 아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의 이원론이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이원론을 바탕으로 신화에 숨어있는 논리를 찾아보도록 하자.
이 세상에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주려고 해도, 모순과 악이 넘친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선하고 완전한 신이 어떻게 모순과 악이 넘치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이 의문은 '악에 가득한 이 세상은 악신의 작품일 수밖에 없다'라는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즉 영지주의에서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발견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원론에 근거한 세상의 부정'이라는 시각이 영지주의의 우주론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라 하겠다.
'빛'과 '질료'로 이루어진 세상에 사는 인간도 '혼'(혹은, 영)과 '육'이라는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빛과 질료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신의 세계'의 부산물인 '영혼'은 물질 세계의 부산물인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다.
인간도 세상에 속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모순을 가진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처럼 감옥살이하는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신의 세계에 관한 '그노시스'(지식)를 얻는 길뿐이며, 그 지식을 얻으려면 반드시 신의 세계에서 세상으로 그 지식을 날라다 주는 중간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그노시스를 가져다주는 중간자가 바로 구원자가 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중간자를 통해그노시스를 획득함으로써 육을 벗어나 영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영지주의 구원론의 기초 논리인 셈이다.
그처럼 영지주의 구원론은 우주론과 인간론을 기초로 한다.
요한 1,1-9를 보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하느님/세상, 빛/어둠 등등의 이원론적인 설명체계는 물론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그리고 세상에 구원자로 온 '로고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는 전적으로 요한계 교회가 위치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소아시아 지역의 에페소가 영지주의 사상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도 그 지역 사람들에게 익숙한 설명체계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박태식 교수의 강의 중에서-
'교리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위일체 (0) | 2008.04.19 |
---|---|
한스킹의 사도신경중 (0) | 2008.04.19 |
한스킹의 사도신경 (0) | 2008.04.19 |
가톨릭 예화 (0) | 2008.04.19 |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견진교리 목차 (0) | 2008.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