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성서시대 사람들은 "영"이나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작용을 어떻게 표상했던가? 구체적이지만 포착할 수 없고, 볼 수 없으나 강력하며, 인간이 호흡하는 공기처럼 생명에 필수적이고, 바람이나 폭풍처럼 역동적이다 - 이것이 영이다.
모든 언어에 이 영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으며, 이 단어들의 성性이 갖가지임은 영이 그리 간단히 규정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는 (독일어 "가이스트"Geist도) 남성이고, 히브리어 "루아흐"ruach는 여성이며, 그리스어 "프네우마"pneuma는 중성이다.
어쨌든 영은 인간적 인격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다. "루아흐": 이것은, 창세기 첫장에 따르면, 깊은 물 위를 휘돌고 있는 하느님의 "숨" 혹은 "돌풍"이다. 그리고 "프네우마": 이것은, 신약성서에 의하면, 피조된 덧없는 실재인 "육肉"에 대립되며,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동하는 힘이요 능력이다. 이렇게 영은 창조적으로 또는 파괴적으로 (곧, 생명 또는 심판에) 작용하고, 창조 안에서처럼 역사 안에서도,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서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역사하는 하느님의 볼 수 없는 힘이요 능력이다.
성서에 따르면 이 힘은 강력하게 혹은 그윽하게 인간을 엄습하며, 개인들 또는 엘 그레꼬의 그림에서처럼 한 무리의 인간들을 몰아경에 빠뜨릴 수 있다. 영은 위대한 인물들에게 역사한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들. 예언자들, 그리고 우리 그림에서처럼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역사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몸을 기울이고 있는, 붉은 색으로 채색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림의 중심부에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그런데 왜 이 영이 거룩한 영인가? 인간과 세상의 부정不淨한 영과 구별되고, 홀로 거룩하신 하느님 자신의 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까닭에 이 영은 "거룩하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종교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활기찬 자연의 마술적. 물체적. 신비적. 초자연적인 어떤 유동체流動體 같은 것이 아니다(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정령숭배(물활론)에서 말하는 무슨 마력을 지닌 존재도 전혀 아니다(정령이나 유령이 아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성령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하느님이 인간과 세상에 가까이 계시고, 움켜쥐시는 그러나 잡혀지지 않는 힘으로서, 생명을 주시는 그러나 또한 심판하시는 권능으로서, 선사하시는 그러나 인간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은총으로서 인간과 세상 안에 내재하시는 한, 하느님 자신이 성령이시다.
여기서 중간 질문 하나: "그렇다면 인간적 모습을 통한 성령 묘사를 마침내 몰아냈던 비둘기(본디 고대 동방 사랑의 여신의 심부름꾼 새) 상징이 오히려 신인동형적 관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까?" 대답: 이 상징 - 아마 초기 유대교의 지혜 전통(필로)을 거쳐 예수 세례 이야기 안으로 들어왔을 - 은 모성적이고 여성적인 것, 생명을 주는 것, 사랑, 평화의 상징인 바, 과연 하느님 안에 있는 여성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여성적 차원은 남성적 차원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신 안에는,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성적 구별이 포함되고 또한 동시에 극복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정해야 할 사실: 성령에 관한 대부분의 오해는 사람들이 성령을 마치 하나의 신화적 존재(형상)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 개별화시켜 온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 니케아 공의회(325)의 본디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이 성령론에까지 심화. 확대된 것은 이 공의회의 공헌이다 - 는 단호히 강조하고 있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본질(존재)을 같이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을 일종의 제삼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어떤 것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된다. 그렇다. 성령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 자신의 인격적 가까움을 뜻한다. 태양 광선이 태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듯이, 성령은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여질 수 없다. 따라서 도대체 볼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하느님이 어떻게 신앙인과 신앙 공동체에 가까이 계시고 현존하시는지 묻는다면, 신약성서는 한 입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까이 계시다.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아니 성령으로서 현존하신다. 그리고 하느님께 들여높여지고 거두어진 예수가 도대체 어떻게 신앙인과 신앙 공동체에 가까이 계시는지 묻는다면, 바울로의 대답은 이렇다: 예수는 "생명을 주는 영"(1고린 15,45)이 되셨다. 과연 "주님Kyrios(예수, 들어높여진 분)은 곧 영"이시다(2고린 3,17).
이것이 의미하는 것: 하느님의 영은 이제 동시에 하느님께 들여높여진 분의 영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들어높여진 주님은 이제 성령의 존재방식과 역사방식 안에 계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성령을 통해,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서 현존하실 수 있다. 신앙인이 하느님, 주님 그리고 성령과 만날 때, 그것은 실제에 있어 하나의 동일한 만남이다.
아무튼 명심할 점: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인간의 주관적 기억이나 신앙을 통해서만 현존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향하시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영적 실재성, 현재성, 활동성을 통해 현존하신다.
"그러나 이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다시 한번 성령강림에로 돌아가기로 하자. 도대체 성령강림이란 역사적 사건인가?" 현대인들의 회의에 가득찬 이 물음은 정당하다. 이 물음은 아마 엘 그레꼬의 얼굴에도 이미 나타나 있다. 그는 스스로를, 말하자면 열세번째 사도로서, 자신의 성령강림 그림 안에 그려넣었다. 그러나 그 그림 속의 화가는 환희에 차서 위를 올려다보는 대신, 그림을 보는 사람의 얼굴을 냉정하게 마주보고 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스 큉, "믿나이다"(현대인을 위한 사도신경 해설)에서...
성령: 교회, 성인들의 통공, 죄의 용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하느님의 아들에 관해 말하기는 더 어려웠다. 그러나 포착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물론 그림으로 나타낼 수도 없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에 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1. 영신화된 그림
서양미술사에 다른 화가들보다 훨씬 강렬한 영신화靈神化에의 열망을 지녔던 한 화가가 있다. 그의 많은 그림들이 몰아적 감동으로 빛나고 있다. 그가 그린 공간은 사실적이기보다는 흔히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수직성, 위로 향하려 애쓰는 움직임이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물들은 의도적으로 신장을 늘리어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명암 구사도 매우 극적이다. 윤곽은 가물거린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인물들의 표정 풍부한 눈을 제외하고, 탈脫 영상화되어 있다.
이 화가는 그리스. 비잔틴 예술 세계 출신이지만,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티치안Tizian, 틴토렌토Tintoretto 등의 대가로부터 르네상스의 기교와 성과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을 스페인 민중에게 친근한 신비적 종교심과 결합시켰다. 그 자신 스페인 사람이 아니나, 스페인 사람보다 더 스페인 사람다웠다: 엘 그레꼬 El Greco(1541-1614)라 불리는 크레타 출신의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 그는 화가일 뿐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그리고 미술이론가였다.
작품 완성을 위해 갈수록 아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마지막 창작 시기에, 70세를 눈앞에 둔 무르익은 이 예술가는, 성탄이나 성금요일 또는 부활과 비교할 때, 서양 회화에서 매우 드물게만 찾아볼 수 있던 주제, 곧 성령강림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수직적으로 위를 향해 치솟으려는 이 그림(지금 마드리드의 프라도Prado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에서 우리는 탈사실적 무대장치의 녹회색 배경 앞에 성령에 사로잡힌 일군의 사람들(두 여자와 열두 남자)을 볼 수 있다.
얼굴 표정과 몸짓에서 읽을 수 있는 강렬한 흥분이 그들을 움켜쥐고 있다. 몇은 손을 높이 뻗고, 몇은 목을 위로 향하며, 몇은 신비에 붙들려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윗부분의 열 사람은, 그리스.비잔틴 회화에서처럼, 똑같은 높이로 그려져 있고, 아랫부분에 비스듬히 배치된 인물들은 놀라서 뒤로 물러나 있다. 인물들의 짙은 색(녹색.노랑색.빨강색.고동색) 옷이 위로부터 오는 빛을 받고 있다.
각각의 인물들 위에는, 그들을 뚜렷이 드러내고 격동과 환희로 가득 차게 만드는 하나씩의 작고 빛나는 불꽃 혀가 떠돌고 있다. 이 매우 극적인 그림은 거의 표현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대담함을 지니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이 있고 탈물질적이며 영신화되어 있다.
성령 자신을 맨 위에,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신적인 광휘 안에, 예수 세례 이야기를 좇아 이미 일찍부터 성령강림 묘사에 사용된 비둘기 상징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 비둘기 상징은 중세 초기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16/17세기 바로 엘 그레꼬 시대 이래 다시금 널리 쓰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거듭 새삼, 요한 복음서의 진술들과 연계하여, 성령을 한 인격처럼 '위로자'로 말하지 않는가? 성령은 적어도 중세 미술에서는 흔히 곧바로 인간적 모습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중세 미술에서 성령은 흔히 성부, 성자와 함께 닮은 세 인간적 모습(말하자면 세 천사나 신들!)으로 묘사되며, 그중 셋째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또는 아주 반대로, 13세기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까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성을 흔히 머리나 얼굴 셋을 가진 한 형상(말하자면 세 양식을 지닌 한 신!)으로 묘사했다. 아무튼 삼신설三神說과 양식설 둘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을까?
듣고 놀랄 일: 위의 두가지 표현을 교종들은 금지했다. 이미 1628년 우르바노 8세는 너무나 인간적인 이 삼위일체 상징들을 금지했고, 계몽된 베네딕도 14세(1745) 이래 성령은 오직 비둘기 모습으로만 묘사되어야 했다. 우리 세기의 1928년에도 로마의 검사성성(오늘날의 신앙교리성)은 그 결정을 엄수할 것을 새삼 명령했다. 이래서 절실한 근본적인 물음:
한스 큉 "믿나이다"(사도신경 해설)에서...
신약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대토지를 소유한 부자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타마 스스로 말하기를, 온갖 잔치와 인생의 향락에 흠뻑 빠져 살았다고 했는데, 예수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다.
예수는 분명히 고타마 같은 복많은 아들들을 삶의 권태로 내몰고 그리하여 부모의 집을 떠나게 만드는 저 넌더리나는 사치와 풍요는 한번도 가져볼 수 없는 장인匠人 집안 출신이었다.
고타마와는 달리 예수는 삶이 지겹고 문명에 싫증나서 풍요로운 상류사회로부터 나와버러려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찾아가지 않았다. 여하한 당파나 인간적 권위도 내세우지도, 존칭을 요구하지도,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나 지위를 선포의 주제로 삼지도 않았다.
힘들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 가난한 사람들을 향했다. 가난이 바람직한 이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 자신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전혀 다른 현실에 대한 개방성을 아직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복되다고 선언했다.
예수는 하나das Eine를 찾고자 애쓰는 홀로 있는 사람Monachus(수도자. 승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생활 공동체의 스승이었다. 그는 이 공동생활을 위해 어떠한 수도회(교단)도 세우지 않았으며, 아무런 규칙도 서원도 금욕적 계명도 유별난 의복이나 전통도 제정하지 않았다.
예수에게 이 세상은 피해 물러나 관조와 명상을 통해 그 헛됨을 깨달아야 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은 그런 식의 절대(무)와 단순히 동일시될 수 없다. 이 세상은 오히려, 비록 인간에 의해 언제나 다시 망쳐지더라도, 하느님의 좋은 창조물인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삶의 전환은 그릇된 길을 버리고 자기 고유의 구원을 추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의 특별한 깨달음이나 전환의 체험을 내세우지 않는다. 삶의 전환은 감추어져 있던 것이 뚜렷이 드러남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한분 하느님을 깊이 체험함으로써,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하느님을 예수는 더없는 친밀감을 지니고 "아빠"Abba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멂과 가까움, (아빠의) 힘과 (부르는 사람의) 안전감을 동시에 표현한다. 아무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생멸의 순환에서 내려버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궁극적인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목표다.
신비가적 경건성과 예언자적 경건성의 구별에 의지한다면, 우리는 고타마와 예수의 상이점을 분명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별은 하일러Heiler 등이 발전시켰고, 요즈음 멘슁G. Mensching 이 붓다 고타마와 그리스도 예수에게 새로이 적용시켰다. 여기에 따르면 붓다와 그리스도는 각기 고유한 위대성을 지니고 있다:
- 붓다 고타마는 자신 안에 평정을 이루고 머루르는, 신비스러운 영혼을 지닌 깨달은 자요 길을 가리켜 주는 자다.
- 누구에게도 파견받지 않았으나, 붓다는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기 위해 삶의 의지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고, 세상을 버린 내성內省, 방편으로서의 침잠과 명상, 그리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촉구했다. 따라서 인간적인 모든 인연을 떠난 평등심 안에서 모든 살아 있는 조물(인간과 동물)에게 동정과 자비와 호의를 베푼다 : 보편적인 자비와 온유한 호의.
-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열정과 감동에 사로잡힌 예언자 정신으로 사무친 파견받은 자요 길을 가르쳐주는 자다. 그리고 이미 살아 생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아. 그리스도)였다.
- 온갖 죄악을 벗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예수는 인간들에게 회개를 요구한다. 삶의 의지의 포기를 가르치는 대신, 바로 그가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곧추세우라고 촉구한 인간의 의지에 호소한다. 하느님의 의지는 온전히 인간의 포괄적인 행복, 곧 구원을 겨냥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깊은 인간적인 사랑, 모든 고통받는 사람. 억눌린 사람. 병든 사람. 죄인 또 적과 원수도 온통 끌어안는 사랑을 선포한다.하나의 보편적인 사랑과 적극적인 선행.
그러면 - 우리는 계속 역사적인 관찰에 머물고자 하거니와 - 예수와 고타마의 근본적인 상이점은 궁극적으로 어디 있는가?
'교리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스킹의 사도신경중 (0) | 2008.04.19 |
---|---|
영지주의 (0) | 2008.04.19 |
가톨릭 예화 (0) | 2008.04.19 |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견진교리 목차 (0) | 2008.03.26 |
성삼일 젼례 (0) | 2008.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