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기유메트의 영성

버스 안에서

마가렛나라 2014. 6. 17. 03:20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그분 것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

[지혜 1,13-14; 11,26]


터키-그리스 전쟁과 예나 전투의 날짜는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이 없어라." 하는
문구는 언제 생겨났는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문구는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진정 위대한 사건들은 결코 기록되지 아니하여도 기억되고 있다.

[아브라함 헤셸, 「자유의 불확실성」ㅡ '인간 존재에 관한 에세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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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랙스턴 정거장에서 버스를 탔을 때, 엘자의 두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눈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을씨년스런 11월 오후인 탓에 다들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거나, 크리스마스 계획, 혹은 개인적인 일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리에 앉자 마침내 엘자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리석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죽음에 직면한 사람 같잖아.'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로 표지판들에 눈길을 주면서 좀더 안정을 찾으려 애썼다. 저곳은 록허스트일까, 파크일까? 아니 맙소사, 벌써 클리블랜드잖아! 아아, 시한부 인생인 사람에게 시간은 마치 쏜살같구나! 몇 달이지?

"길어야 여섯 달, 일백하고 여든 날."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다운사이드 가(街), 그 다음엔 초승달 모양의 트릴비 광장이 휙 지나갔다.

일백여든 날. 그 동안에 무얼 하지? 물론 지리한 죽음의 절차들(통증 심화, 약물 복용에 따른 반(半)의식 상태, 마지막 혼수 상태)이 그 일백여든 날의 일부마저 잠식할 터였다. 의사의 추정은 최대치이므로 실제로는 거기서 한 달, 아니 두 달이나 석 달까지도 빼야 할지 모른다. 으음! 그렇게 되면 정상 생활 일수는 단지 일백 일 남짓으로 줄어든다. 마지막 백 일 동안 무얼 하지?

문득 엘자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유명한 성가가 떠올랐다. 그런데 어떻게 부르더라? 아, 그렇지!

"이 한 목숨 다할 때까지, 오 주여,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나이다. 찬미가 부르며 감사드리겠나이다. …평생토록."

그녀는 항상 그 노래가 좋았다. 그 노래는 언제나 환희로 들렸다. 그렇다! 바로 그 말이었다, 환희라는 말. 그 말은 시간에 대한 기쁨의 찬양을 담고 있었다. 트럼펫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어떤 것.

이제 그녀의 눈물은 말라 있었다. 그녀는 심각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다. 희미하게 느끼긴 했지만 마지막 일백 일을 사는 방법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선택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 가도를 마악 지났다. 다음은 멀베리 가일 것이다. 그 다음엔 엘스워드 정거장. 네 정거장, 아니 다섯 정거장 더 가면 그녀의 집이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일백 일에 관한 중대 결정은 바로 그 자리에서, 버스 안에서, 집에 당도하기 전에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자기 생애의 잔여 기간을 어떻게 보낼지 단호하게 결정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엘스워드에서 버스가 섰다. 중년 부인이 한 사람 탔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일 년 전에 암으로 죽은 친구를 닮은 것 같았다.

친구 제인 러브레이스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던가!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인생의 남은 날 수를 부엌 냉장고에 적어 두고 그 하루하루를 멋지게 살기로 작정했다.

제인은 호라티우스의 작품을 인용해서 말하곤 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 이 말이지."

그녀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내일 일일랑 내일 걱정하고 순간을 즐겨라."

친구의 마지막 수개월의 생활이 어떠했던가 너무도 기억이 생생했다. 강아지를 사고, 될 수 있으면 많이 웃고, 운동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뒤뜰에다가 야생생물 서식장을 만들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석들을 나누어 주었다.

친구처럼 살다가 불꽃 같은 영화를 누리며 죽어 갈까? 그것은 매혹적이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온 정력을 낭비하는 것보단 백 번 낫다. 따지고 보면,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삶'에 공을 들이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그 순간, 충실한 삶을 이야기한 담화나 에세이들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맨 처음 '충실한 일생'을 살다 가신 성서의 선인들 말씀이 떠올랐다. 다음엔 노자(老子)의 말씀이 떠올랐다.

"외적 용기를 지닌 사람은 죽는 데 용감하고, 내적 용기를 지닌 사람은 사는 데 용감하다."(역주:노자 「도덕경」의 "감행(敢行)하는 데 용감한 자는 죽고, 감행하지 않는 데 용감한 자는 산다."의 영역)

그 다음엔 현대의 한 작가가 죽은 아버지께 바친 아름다운 조사(弔詞)가 생각났다.

"당신은 오직 당신 생의 마지막에만 돌아가셨을 뿐입니다."

케임브리지 시절의 한 격언도 떠올랐다. 그것은 피트 프레스 빌딩에 분필로 쓴 익명의 낙서였다.

"오늘은 당신 남은 생의 첫날이다."

그런가 하면 자주 인용되는 아브라함 링컨의 말도 떠올랐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버스는 다시 한 번 섰다. 창 밖에 보이는 것은 바로 곁에 특유의 소화전(消火栓)이 달린 던햄 가의 정류장이었다. 집까지는 세 정류장밖에 남지 않았다. 옆 좌석 승객이 접어서 들고 있는 신문의 맨 앞 면에 이런 내용이 보였다.

"쇼핑, 크리스마스까지 32일."

그것을 보자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죽기까지 일백 일. 32일보다야 길긴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은 날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셈은 기본적으로 소용 없는 짓이 아닌가?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인간 존재란 모두들 태어난 그날부터 종말적 상태에 놓이며, 아무도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다면 왜 이교도의 슬로건을 따르지 않는가? 내일이면 죽을 몸들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것 말이다.

이 마지막 생각은 아무래도 그녀의 신앙에 어긋났다. 사실 엘자는 그리스도인이었다. 대단히 열렬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충실한 신자임엔 틀림없었다. 삶은 대단한 것인데 그것이 지금 퇴조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오로지 탐닉하며 살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와서 밝히셨던 것을 교묘히 부정하는 짓이라 생각되었다. 당신께서 부활하심은 오늘을 즐기라는 이교도들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논파하심이 아니던가?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사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는 지금 점점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단 두 정류장뿐!

"오, 하느님! 저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쓸데없는 자기 연민에나 빠져서 그 일백 일을 울적하게 보내야 합니까? 이교도들의 인생 예찬에 광분하여 오늘을 즐겨야 합니까? 아니면요?"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다.

버스는 이미 헌트 대로와 킴벌리 가를 지났다. 곧 너게트 가, 그러니까 그녀가 언더힐 애크로이드 교차로에서 내리기 전 마지막 정류장에 도착할 것이다.

다시 그 까닭은 모르겠지만, 긴장을 풀어 주는 손길처럼 그 유명한 성가가 떠올랐다.

"이 한 목숨 다할 때까지, 오 주여,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나이다. 찬미가 부르며 감사드리겠나이다. …평생토록."

너게트 가이다. 버스는 손님을 몇 사람 태우기 위해 멈추어 섰다. 엘자는 본능적으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이 '깡깡이쟁이'라 부르는 노인을 찾았다. 아, 저기 그가 있었다. 미소 띤 얼굴에 비쩍 마른 눈먼 노인, 싸구려 바이올린에서 요정 나라 선율을 뽑아 내는 그 노인. 그는 군중들이 밀쳐 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 가득 흐트러짐 없이 평온스럽게 저기 길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앞이 안 보였지만, 누더기를 걸치고 동냥 그릇을 앞에 놓고 있었지만, 분명 행복해 보였다.

엘자는 늘, 그 싸구려 바이올린에서 어떻게 그런 따스함과 행복감이 흘러나올 수 있는 건지 경이로워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엔 자신과 그를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인생을 예찬할 자신의 이유를 가졌다면 나라고 갖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모르긴 해도 그보다는 더 많지 않을까?

버스가 보도에서 벗어나 요란한 소음을 내며 천천히 다음 구간에 접어들자,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곰곰이 돌이켜보았다. 행복한 어린 시절, 안정적인 결혼 생활, 장성해서 자리를 잡은 자식들, 늘 가까이 있는 다정한 친구들, 경제적 안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닥쳐도 영혼의 기본적 안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그리스도교 신앙.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런 선물들은 최소한 백 일 이상 찬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불현듯,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사고로 죽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들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자신은 하느님께 나아갈 준비를 할 아름다운 시간을 허락받고 있는 이 순간에 말이다. 이 일백 일 동안,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찬양하는 것보다 더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일이 혹시라도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입술엔 미소를, 가슴엔 감사를 담고 그분께 가서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신 그분 품안에 안겨드는 가장 적절한 길이 아닐까?

물론, 일부나마 죽어 가면서 친구 제인 러브레이스가 했던 일들도 할 터이다. '살기' 위해 계속 최선을 다할 것이겠지만 단순히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을 예찬할 것이며, 오래 미루어 두었던 꿈에 빠져도 보고, 조바심은 바람에 날려 버리리라. 그렇다고, 케케묵은 이교도들이 죽음을 비웃듯, 도전 행위로서 그리하진 않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선물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하느님께 올리는 축배로서 그리할 것이다. 그래, 정말 불꽃같이 영광스레 죽자.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32번 버스 안, 너게트 가와 언더힐 애크로이드 교차로 사이 어디쯤에서 엘자는 생애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버스가 서고 마침내 하차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한 목숨 다할 때까지 오 주여,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나이다. 찬미가 부르며 감사드리겠나이다. …평생토록."

닐 기유메트ㅡ『땅 끝까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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