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바보
닐 기유메트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아무도 엠마를 똑똑한 소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상냥하고 순진한 미소를 보면 그녀는 하느님이 이제까지 창조하신 피조물 중 가장 단순한 마음의 소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고, 어리석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보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그녀가, 자칫 우둔함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정직함이라는 선천적 장점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엠마는 마음이 어린이와 같이 천진하고 단순했는데,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열여덟 살 때 엠마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서 상류계층인 가브리엘 가(家)의 하녀로 고용되었다. 그녀의 주인 가족들은 속물스러웠고 고용인들에 대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해 주지를 않았다. 그들은 고용인들을 마치 무슨 부속품을 대하듯 비인간적으로 마구 대하였다. 엠마는 선천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과 상냥함으로 대하려 노력했는데도 가브리엘 가의 사람들은 사실 그대로 그녀를 보지 않고 계속 비인간적으로 대할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 그녀는 단지 하녀, 다시 말하면 인간 도구일 뿐이었다. 도구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엠마가 해야 할 많은 일 중 하나는, 주위 사람 어느 누구에게나 한 번도 좋은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괴팍하고 역정을 잘 내는, 가브리엘 일가의 노부인을 성당에 모시고 가는 일이었다. 가족들은 이러한 그녀의 괴팍한 성미를 잘 참아 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비록 그녀가 직접 재산을 관리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가브리엘 가의 모든 재산의 명목상 소유권자였기 때문이었다. 엠마는 매일 성당에 가는 동안, 망부(亡夫)의 유산을 상속받은, 성미가 까다로운 이 노과부를 즐겁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노과부는 엠마가 사람들에게 단순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불만스럽기라도 한 듯 더욱 퉁명스럽게 딱딱거릴 뿐이었다.
노부인의 성미가 급하고 도량이 좁았는데도 엠마는 이 매일의 성당 방문을 즐기게 되었다. 사실 이 방문이, 날마다 반복해서 해야만 하는 산더미 같은 일에 둘러싸여 있는 그녀가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교육받지 못한 아픔을 통절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려는 바람에서 미사의 독서를 아주 주의 깊게 귀 기울여 듣기로 마음먹었다. 독서에서 그녀는 특히, 우리가 작아지고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여러 서간에 기록되어 있는 성 바오로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그녀에게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녀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되어야 하며, 이른바 이 세상의 지혜를 그저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깊이 새겼다.
왠지 모르게 그녀는 이러한 생각들에 마음이 끌렸고, 나이가 지긋한 가브리엘 노부인을 성당에 모시고 갔다올 때마다 그 생각들을 묵상하곤 했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같은 고결한 생각들을 삶으로 실천할 기회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의 여주인(가브리엘 노부인이 아니라, 가브리엘 노부인의 딸이며 이 집안의 실제적 가장인 마담 가브리엘)은 자신의 반지 중 하나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엄청난 소동을 일으켰다. 반지를 찾기 위해 모든 사람이 동원되었지만 허사였다. 반지는 아무 데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반지가 없어지게 된 경위는 아주 간단했다. 마담 가브리엘의 십대 딸 조세핀이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그 반지를 꺼내서 끼고 파티에 갔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조세핀은 그 반지를 잃어버렸다. 그 후 소녀는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 어머니에게 자기 잘못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엠마가 아주 우연히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속 온 집 안을 구석구석 다 뒤져도 반지가 나오지 않자, 자연히 마담 가브리엘은 하인들 중 누군가가 그 보석 반지를 훔쳐 갔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엠마가 가장 최근에 고용된 하녀이고 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마담은 즉각 엠마가 범인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마담은 엠마가 노부인과 함께 성당에 간 사이에 엠마의 작은 침실을 뒤졌다. 성당에서 돌아왔을 때 엠마는 자신의 모든 물건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누가 이 사건의 진짜 범인인지를 마담에게 폭로함으로써 신망을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조세핀과 얘기하여 어머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도록 소녀를 설득시킬 것인가? 그녀가 공개적으로 비난받고 해고당하기 전에 하녀 일을 그만둘 것인가?
이러한 모든 질문과 생각들이 그날 하루 종일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엠마는 자기를 인도해 달라고, 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마비된 것 같았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렇게 여러 날 동안 가족들의 생활을 혼란하게 만들고 망쳐 놓은 그 소동이 일어났던 내내 조세핀이 오랫동안 계속 침묵해 온 터에 조세핀의 죄가 발각된다면, 그 소녀와 어머니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었다. 조세핀에게 한 번도 다정하게 대해 준 적이 없었던 소녀의 어머니는 딸의 이중성에 분명히 극도로 분개할 것이고, 이미 그들 사이의 벌어진 틈은 눈에 띄게 깊어질 것이다. 이것은 그러지 않아도 진정한 가족간의 사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가족 안에 또 다른 불화가 일어남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엠마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리라고 그날 저녁 마음먹었다.
다음 날 아침, 서슬이 퍼런 마담의 거친 말투에서 그녀는 반지 사건에서 자신이 의심받고 있음을 느꼈다. 엠마는 자신을 위해 어떻게 말해야 했는가?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마님."
엠마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마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저는 제 생애에 결코 아무것도 훔친 적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뚜렷하고 솔직한 엠마의 태도는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녀가 결백하다는 것을 명백히 납득시킬 수 있었으므로 마담은 얼마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엠마가 결백하다고 확신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국엔 엠마가 잠깐 실수로 자기 본심을 드러내고 어디에 반지를 숨겼는지를 누설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엠마를 계속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마담은 엠마에게 일자리로 돌아가 이제부터는 그녀의 직무를 특별히 조심해서 수행하라고 짤막하고 퉁명스럽게 명령했다.
반지 사건으로 인해 엠마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전에는 그 가족들이 그녀를,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어느 정도만 무시해 왔는 데 반해, 이제는 드러내 놓고 그녀를 멸시했다. 그래도 엠마는 그들이 아무리 불쾌하고 가혹하게 대해도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로 응했기 때문에 바보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바보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런 상태가 몇 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몇 주일이 몇 달로 연장되었다. 그 다음엔 이것이 17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세월 동안 내내 엠마는 가족들의 조소의 대상이 되었고 이웃들까지도 자나깨나 빈정거렸다. 아무리 그녀가 노력을 해도 누구의 마음도 기쁘게 해줄 수 없고 아무 일도 제대로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녀는 마담의 성가신 심한 잔소리, 조세핀의 적대감(그녀는 엠마가 그녀의 죄를 어머니에게 일러바치지나 않을까 하여 항상 두려워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운전기사로부터 집안의 잡일꾼에 이르기까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우월감을 갖고 대하는 태도를 참고 받아야 했다. 이 세월들은 엠마에게 매우 견디기 힘든 시련의 나날이었다. 여러 번 그녀는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을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녀의 분별력 있는 이성은 이렇게 말하곤 하는 것이었다.
'네가 오직 하녀의 신분일 뿐이라면 네 주인이 누구이든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잖아? 즉 넌 주인의 눈에는 여전히 하녀일 뿐이라고. 다시 말해 인간 도구에 불과한 거야.'
그렇지만 이 시련의 세월은 그녀의 내적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복음, 특히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고 묵상하는 데 깊이 빠져들었다. 수난기는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고, 그녀는 집안의 허드렛일들을 하면서 마치 그녀 자신이 예수님의 수난 현장에 함께 있는 것처럼 상상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군인들이 예수님께 수치스러운 긴 자주색 옷을 입히고, 그분을 조롱하는 로마 총독 관저의 장면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아니면 헤로데가 예수님을 조롱하는 장면을 되새겨 보곤 했다. 물론 그녀는 단순했기 때문에 자신을 예수님과 비교할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쨌든 예수님과 자기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느꼈으며, 이러한 생각은 불행한 가운데서도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다.
이런 상태가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엠마의 혹독한 시련은 비극적인 12월 어느 저녁에 뜻밖의 일로 일시에 끝나 버렸다. 한 기도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강도의 습격을 받아 잔인하게 두들겨 맞고 의식을 잃은 채 도랑에 버려졌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되어 위독한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틀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가 몇 분 동안 잠깐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곁에 있던 간호사의 귀에다 대고, 자신을 습격했던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속삭였다. 그날 밤, 그녀는 순간적인 단말마의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담은 자신의 하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았을 때 오직 한 마디만 했다.
"불쌍한 엠마는 결코 손톱만큼도 자존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어. 그 바보 같은 애는 강도에게 죽임을 당하고도 그를 지옥으로 꺼지라고 저주하는 대신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다니…. 정말 얼마나 바보인가!"
마담의 말은 한 치도 틀림없이 옳았다. 엠마는 바보였다. 그런데 한편 그 바보는 하늘 나라 한가운데서 프란치스코, 도미니코, 데레사 성인 그리고 하느님의 다른 모든 바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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