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오로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사도 바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과 함께 공생활을 하지도 못한 사람을 사도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를 알기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신구약 통합해서 모두 73권이며 구약46권과 신약27권으로 되어 있다.
구약은 접어두고
신악은 언제 쓰여 졌으며 누가 썼는지 그리고 시대배경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복음서가 4권이고 사도행전 한권, 바오로 서간 13권, 히브리서, 공동서간 7권, 묵시록 한권
신약에 있어서의 세 가지 중요사항
첫째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신앙의 핵심)
둘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의 모든 희망을 성취)
셋째 주님이신 예수님, (예수그리스도 위에 뛰어난 이름 즉 하느님께만 쓰던 이름)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의 정치적 상황
기원전 63년 로마는 예루살렘 점령 - 이두매아 출신 안티파텔 (실권자)이 43년 암살당함
그의 아들 헤로데가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으로 33년간 다스림(기원전 37-4년)
헤로데의 예루살렘 성전증축, 세금징수, 그리스 문화 개방,
헤로데 대왕이 죽고 세 아들에게 분활
헤로데 아르켈라오는 유다와 사람리아, 헤로데 안티파스(요한의 죽음과 수난에 등장)는 갈릴래아와 베레아, 헤로데 필립보는 대부분의 북동부지역.
아우구스토 황제에 의해 아르켈라오가 폐위됨. 이때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지역은 로마의 총치권을 받는 속주가 됨.
34년 필립보가 죽고 39년 안티파스가 파직됨으로 전국토가 로마 총독 관할로 됨.
기원 후 41-44년 사이에 팔레스티나는 헤로데 아그리빠 1세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투옥 사건으로 알려진 인물. 사도 12장 참조)의 통치를 받다가 다시 로마총독의 지배를 받음.
기원 후6- 66년(41-44년 뺀)까지 로마 통치하에 호구조사, 세금부과등으로 시민소요. 불만으로 기원후 6년 갈릴래아 출신 유다의 로마에 대한 폭동.(사도5,37참조)-이스라엘의 통치자는 하느님 한 분 뿐이다.
이 폭동으로 유다인 2만명 이상 처형. 66년에 정권인수. (66년-70년 1차 독립전쟁) 4년뒤인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 도시가 폐허로 됨.
마지막 전쟁이 마사다 산상의 항전 (73년까지 버팀) 패망함.(요세푸스의 유다전쟁기)
예루살렘 파괴 후 팔레스티나는 황제특사의 지배를 받음
132년 시메온 바르 코크바라는 인물의 영도하에 무력봉기 (제 2차 독립 132-135년)
135년 완전 파멸.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됨.
바오로의 생애
예수님의 죽으심과 영광스러운 부활 후에 스테파노의 순교를 목격하고 그리스도교의 박해를 피해 달아난 해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몇몇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는데 (사도 11.19-21)이것이 이방인 전도의 효시이다.
물론 그 전에 필립보가 애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였고(사도8,26-40), 베드로가 가이사리아로 가서 고르넬리오 백부장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례가 있지만(사도10,34-38), 그런한 전도는 예외적이다.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도는 바르나바와 바오로며 1년동안 함께 안티오키아에 복을을 선포한 이후에 (사도 11,25-26),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하였다.
진리의 사도, 이방인의 사도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성인은 바오로 성인이다.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를 거쳐 로마 제국에 까지
바오로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하였고 그의 노력으로 민족적, 지역적 종교가 인류 전체를 향한 세계 종교로 탈바꿈 하였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삶을 살았으며 예수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인생을 관조하고 선교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초창기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 한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보였던 바오로는 그의 생애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도 신앙적 여운을 남겨준다고 하겠다.
바오로의 공식 축일은 6월 29일이고, 개종 축일은 1월 25일이다.
1. 출생
36년-37년경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겉옷을 맡았다는 것과 (사도7,58), 55년경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인으로 자처한다(필레1,9)
성서학자들은 바오로의 출생을 기원 후 5-10년으로 추정 할뿐 정확한 출생 연대나 나이를 알 수 없다.
바오로가 출생한 곳은 길리기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여 났다.
타르수스는 상업과 교육 그리고 문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이다.
2. 가족관계
바오로의 출생, 할례, 성장, 교육, 처신 등을 살펴보면 그는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여 나 가말리엘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베냐민 지파로 (유다인 들은 유다지파, 베냐민지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바리사이들이고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던 부류들이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갈라 1,13-14 ; 로마 11,1 ; 필리피3,5-6; 사도16,37-38 ; 22,25-29 ; 23,27 참조)
3. 이름
바오로는 친서에서 자신을 항상 ‘바오로‘ 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7장 58절부터 13장 7절까지에서는 사울이라고 하다가 13장 9절에서는 일명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 이라고 한다음 13장 13절에서 28장 25절에서는 바오로라고만 한다.
초대 왕인 베냐민 지파 출신 사울왕의 이름을 본따 사울이라고 지었으나 로마식으로 바오로라고 한다. 원래 두 개의 이름이지 개종하여 만든 이름이 아니다.
두 문화권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4. 직업
바오로는 선교 중에 스스로 생계비와 선교비를 벌어서 조달하였다. (1테살 2,9 ; 1코린 9,4-18) 그는 신자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돈 때문에 선교한다는 오해를 받기 �어하였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였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51년-52년경 그가 코린토에서 선교할 때 아퀼아와 브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사도 18,3)
그것이 직업이 아니었을까 한다.
5. 인물과 성격
외경인 바오로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키가 작고 대머리이며 다리는 약간 굽었으나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고, 속눈썹이 길었으며, 코가 컸다고 한다.
다른 외경이나 초대교회의 여러 저서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아마 사도행전 (9,25 ; 14, 11-12)과 바오로의 편지(2코린 10,10; 11,23)를 보고 추측한 것이라 생각된다.
키가작은 사람으로 전해지는 데 Paulus 라는 말이 라틴어로 ‘작은’것을 뜻한다고 해석한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모두 정확한 근거는 없다.
성격 역시 그의 편지와 사도행전을 통하여 짐작할 뿐이다.
유다교도 철저히 신봉한 사람이고, 회심한 다음에도 열성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선교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는 불같은 성격이고 매우 강한 사람으로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해하는데도 앞장섰고, 회심한 다음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선교하였다.
6. 언변
명설교가였던 아폴로와는 달리 바오로는 말재주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정열적이고 다혈질로서 정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감정에 치우치는 일 없이 자신의 성격을 잘 조절하여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행동 위주의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편지에 의하면 바오로는 깊은 영성을 지닌 사람으로 자립심이 강하여 많은 사도직 활동을 하면서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누구에게든 거리낌 없이 바른 말을 하는 용기도 있었고 교회 건설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줄도 알았고 모든 사람에게 봉사할 줄도 아는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7. 회심
36년경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 한 점의 구름도 없는 맑은 하늘로부터 번개와 같은 한 줄기 빛이 그를 땅에 쓰러뜨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고 두 번이나 되풀이하시는 말씀을 듣고 넘어진 그 순간에 그의 몸에 비쳤던 빛은 그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비췄다. 그 후 그는 개종하여 예수님을 선포하는데 일생을 바치며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활약하게 된다. (사도 9,1-19 ; 22, 6-11)
예수님을 뵙고 그리스도인 및 사도가 된 바오로의 회심은 그의 앞날을 좌우하는 대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관한해 이야기하기를 싫어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선포하는 데 전심전력한다. 회심 사건을 그저 간결하게 몇 번 언급하거나 암시할 뿐이다.
하지만 루카는 그 체험을 아주 극적으로 묘사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 설교하였다고 한다.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드 다음 3년 후에 게파를 만나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와 보름을 묵었다. (갈라1,17-18)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선교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를 창립하였다.(사도 11, 19-20)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인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하였다.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있던 바오로를 초빙하여 만 1년 동안 (44-45년경) 안티오키아 교회를 함께 돌보았는데 이 사실은 바오로의 서간에는 나오지 않고 사도행전 11장 19-26에만 적혀 있다. 바오로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는 데, 이때 안티오키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처름으로 ‘그리스도인’ 들이라고 불렀다.
1) 다마스쿠스에서 선교함 (사도 9,20)
2) 아라비아로 감 (갈라 1,17)
3) 다마스쿠스로 돌아감 (갈라 1,17)
4) 예루살렘 방문 (갈라 1,18)
5) 교회의 의심을 받음 (사도 9,26)
7) 유다인의 박해 (사도 22,17-18)
8) 환상 중에 떠날 것을 명령 받음 (사도 9, 30)
9) 타르수스로 감 (사도 11, 25-26)
10)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로 감 (사도 11,26)
사도 바오로의 여정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의 주님이심을 바오로는 깨달았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같택함은 네가 이미 본 것돠 또 내가 나타나서 너에게 모여야 할 일에 대해서 증인을 삼기 위함이니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불가사의한 성소가 맞설 수 없는 하느님의 거룩한 뜻임을 바오로가 깨달았기에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고 회치며 초인간적인 존재 그리스도를 자기 품에 품고 세계정복의 선교길에 나셨다.
제1차 선교여행 : 사도행전 13,1-14,28
제1차 선교여행 :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테베
45년부터 49년까지 그는 키프로스, 베르게,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를 전교했고, 이 여행에서 이름을 바오로라고 했다. 여행을 마치고 49년경에 예루살렘에 온 그는 베드로와 야고보 및 다른 사도들을 설득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성 확립에 기여한 한편, 그의 이방인 선교를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도록 하는 등 교회의 체제 안에서도 가일층 진보된 단계를 맞게 하였다.
49년경에 바르나바와 예루살렘 사도호의 참석하고(갈라2,1-10)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한 베드로를 꾸짖음(갈라 2,11-14)
제2차 선교여행 : 사도행전 15, 36-18, 22
제2차 선교여행 : 시리아, 킬리키아, 트로아스, 테살로니카, 베레아, 아레오파고 법정,
코린토, 에페소, 예루살렘을 거쳐 안티오키아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직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제2차 선교여행을 계획한다. (49-52년) 제1차 선교여행에서 세운 교회들을 재차 방문한 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를 가로질러 갔고 최초로 유럽에 복�을 선포하였다. 그는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레아에 교회를 세웠으나, 아테네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을 비판하는‘아레오파고’ 법정 진술만 다소 효과를 내었을 뿐 신통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코린토에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테살로니카1서를 집필함.
52년 봄코린토 유다인들에 의해 칼리오 총독에게 고발 당함(사도 18,12-17)
제3차 선교여행 : 사도행전 18,23-21,16
제3차 선교여행 : 갈라티아, 프리기아, 에페소,트로아스(체류),
트로아스와 카이사리아를 지나 예루살렘,
안티오키아로 귀향한 그는 다시 제3차 선교여행을 계획하였으나(53-59년) 2년 동안은 코린토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에페소에서는 데메트리오라는 은장이 사건이 유명하다.
54-57년, 갈라티아 교회들을 살펴보고 에페소에 가서 27개월간 체류(사도19, 8-10)
갈라티아서와 코린토 전서 집필, 에페소 감옥에서 필리피서와 필레몬서 집필, 석방 후 그리이스 북부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코린토 후서 집필
58년초, 코린토에서 석 달 가량 지내는 동안 (사도 20,3) 로마서 집필함.
58년, 해방절을 필리피에서 보내고 드고아, 밀레토스, 티로, 프톨레마이오, 총독부 가이사리아를 거쳐 오순절 무렵 예루살렘에 상경하여 성전에서 체포됨(사도 21,27-36)
5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야고보를 만나 보았고, 이래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게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다가 출동한로마 군인들에게 체포 되었다. 이때그는 자기의 개종을 설명하고 이방인으 l사도가 된 경위를 비롯하여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60년 가을에서 61년 초에 로마로 압송된다.
58-60년 : 미결수로 카이사리아에서 옥고치름.
60년 : 총독 페스도 앞에서 로마 시민권을 발동하여 황제에게 상소-아그리빠2세와 그의 누이 페르니케에 의해 심문당함(사도 27,1-28,15)
60년 가을에서 61년 초에 로마로 압송된다.
61-63년 : 로마에서 가택 연금됨(사도 28,16-31)-석방 후 스페인에서 선교한 듯함(클레멘스의 코린토 서간 5,7참조)
64-68년 네로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한 듯함 (끌레멘스의 코린토 서간5,1-6,1)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행전은 바르나바가 바오로를 찾아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안티오키아로 데려오는 때부터 바오로의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사도11,25)
두 사람은 안티오키아세 함께 1년동안 일했는데, 이때부터 안티오키아는 바오로의 활동거점이 되었다.
바오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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