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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마가렛나라 2012. 12. 4. 15:32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저자 송봉모

예수회 신부,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을 받고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 주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에 ‘성서와 인간’ 시리즈로 <상처와 용서>, <광야에 선 인간>, <생명을 돌보는 인간>, <고통, 그 인간적인 것>,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본질을 사는 인간>,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 <관계 속의 인간>, <회심하는 인간>,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 이 있고, ‘성서 인물’ 시리즈로 <집념의 인간 야곱>, <신앙의 인간 요셉>, <순례자 아브라함 1,2> 등이 있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을 위해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 의 영문판 The Lord Calls My Name도 펴냈다.

 

 

Table of Contents

 

머리글 상처와 용서, 그리고…

들어가며 다시 행복하기 위하여

1부  용서하기 위하여

1.1  용서,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1.2  그래도 하느님은 용서하길 바라신다

1.3  용서는 자신을 위한 일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지 않으려면 용서가 필요하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용서가 필요하다

1.4  구체적으로 용서하기 위하여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며 용서하려면 먼저 결심이 필요하다.

용서하기로 결심한 다음에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자

상처 치유의 열쇠는 나 자신에게

나를 아프게 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값싼 용서와 섣부른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용서의 완성을 위해서는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1.5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첫 번째: 용서하면 몸과 마음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여야 한다

두 번째: 용서는 곧 화해다

세 번째 오해: 용서했으면 다 잊어야 한다.

네 번째 오해: 중독자나 정신적 문제가 있는 병자와 관련된 오해

1.6  효과적인 용서 방법

1부를 마치며

2 부  사소한 상처에 대하여

2.1  기대하지 마라

2.2  추측하지 마라

2.3  인정과 애정을 구하지 마라

2.4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

2.5  그림자 투사를 하지 마라

3부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에 대하여

3.1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이 부족한 이들

3.2  낮은 자존감의 원인

3.3  자기 사랑은 이기심이나 자기 중심적 태도와 다르다

3.4 자기 존중감을 높이기 위한 노력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을 돌보라

이웃과 자신을 비교하지 마라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표현하라

관계 때문에 희생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대로 실천하라

4부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것

4.1  상처를 준 하느님

4.2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나가며 용서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부록 1 용서를 구하는 기도

부록 2  부정적 감정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길

감정에 귀 기울이기

부정적 감정의 족쇄

감정의 파악

감정을 인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은 또 다른 감정을 일으킨다.

감정은 항구한 것이 아니다

감정 자체가 바로 나는 아니다

감정에 반응하지 않고 선택하는 태도

화 또는 분노에 대한 이해

나 전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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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상처와 용서, 그리고…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은 <상처와 용서>의 개정증보판이다. 이 책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은 바오로딸출판사 편집장 수녀님의 제안 덕분이었다. <상처와 용서>가 나온 지 10년이 넘었으니 오늘에 맞게 개정증보판을 만들면 독자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상처와 용서>는 필자 자신이 5년에 걸친 심리치료와 개인성찰을 하고 또 사목자로서 상처 받은 이들의 신앙 상담을 하면서 나름대로 갖게 된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썼다. 그런데 <상처와 용서>가 책으로 나온 후 늘 한 가닥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필자의 전공이 심리치료나 정신치료가 아니라 성서학 이기에 그 점에서 미비한 것은 아닌가 해서였다.

필자는 <상처와 용서>가 출판된 후에도 지금까지 계속 개인적 관심에서 상처와 용서에 대한 전문서적을 읽어왔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전문서적을 읽으면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상처와 용서>에서 얘기한 내용이 전문가들의 견해와 상치되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미진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권위 있는 전문가들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통찰이 들어간 이론들이안에 함께할 수 있었다면 하는 점이었다. 그랬다면 독자들이 좀 더 깊은 자기 이해와 관계 개선에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편집장 수녀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필자는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을 쓰면서 다음 세 가지 점에 역점을 두었다. 하나는 방금 언급했듯이 심리학자와 정신치료자들의 학문적이고도 탄탄한 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이 실질적 도움을 받도록 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 점이다. 미움의 대상을 용서하고 사소한 상처를 더 이상 받지 않으려면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을 우리 안에 계속 계발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완성을 위해서도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은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이번 개정증보판에서는 이 주제를 독립 항목으로 다루었다.

세 번째는 처음에 쓴 <상처와 용서>에서 충분하게 다루지 못한 주제들을 더 깊이 있게 다룬 것이다. 그리고 미처 다루지 못한 새로운 주제들을 추가 보충함으로써 독자들의 더욱 깊은 이해를 돕고자 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것’이란 주제다.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독자들에게 낯설 수 있다.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감히 창조주 하느님을 용서한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삶이 고통스러울 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느님께 실망하면서 그분과의 관계에 소원하게 되고 심한 경우 적대감까지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러한 분들을 위해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 개정증보판이 독자들에게 상처와 용서에 대해 좀 더 깊고 폭넓은 이해를 갖게 하며 더욱 넓은 지평을 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들어가며 다시 행복하기 위하여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종할 수는 있다.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 폴 마이어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수많은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이 아무리 많은 사람으로 어린 우리를 보호하고 돌보아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과 미성숙함으로 알게 모르게 수많은 상처를 주고 받는다. 우리 자신은 좋은 의도로 상대방을 대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의도가 상대방에게 이해 받지 못하고 무시될 때 우리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나아가 흑심이나 악의를 품은 사람들한테 피해를 받으면 우리 삶은 어느 순간 송두리째 무너지기도 한다.

 

우리 삶에서 어려움이 없을 수 없듯이 인간관계의 갈등도 피할 수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파괴적 언어와 충동적 행동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심지어 친밀한 관계를 박살내기도 한다. 다윗 왕과 그의 아니 미칼의 관계에서 이 점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친밀한 남녀 사이를 표현할 때 늘 남자 중심이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했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으며,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다는 식이다. 그런데 딱 한 차례 여자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사울의 딸 미칼은 다윗을 사랑하고 있었다.” (1사무 18,20)

미칼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버지 사울이 자객을 보내 다윗을 죽이려 하자 아버지를 거역하면서까지 그 음모를 다윗에게 알려 피신하게 한다. (19,11-17) 사울은 미칼이 다윗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팔티라는 남자에게 시집 보낸다.

훗날 사울이 전사하고 나서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칼을 데려오는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사는 여자를 데리고 와 자기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다윗은 달랐다. 그만큼 둘 사이의 사랑은 뜨거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이 얼마 가지를 못한다. 말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남만 못한 부부가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둘 사이가 갈라진 것은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날이었다. 다윗는 그 싸움에서 일전에 빼앗겼던 하느님의 계약의 궤를 되찾은 것이 너무 기뻐서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오며 옷을 벗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하지만 미칼은 성곽 위에서 다윗이 춤추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그리고 다윗이 내실에 들어오자 빈정거렸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 자기 신하들의 여편네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만하더군요!” (2사무 6,20: 필자 의역) 공주로 태어나 왕가의 법도를 익히며 자란 미칼의 처지에서는 다윗의 행위가 왕의 체통을 떨어뜨리는 행위였던 것이다.

미칼이 내뱉은 말은 다윗에게 거센 광풍과도 같은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 다윗은 아내의 빈정거림에 침묵으로 응하거나 화가 가라앉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아내가 자기에게 한 말 이상으로 심한 독설을 퍼부었다. “주님께서는 그대 아버지와 그대 집안을 다 제쳐놓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벌거벗고 춤을 출텐데 이번보다 더 경망하게 굴 것이라는 잔인한 말을 퍼붓는다.(6,21-22)

사실 다윗의 독설은 미칼의 비난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다윗의 독설은 미칼의 가장 아픈 곳, 하느님께 버림받아 적군의 손에 죽은 아버지와 세 오빠의 일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칼에게 대단히 잔인한 말이었다. 다윗의 독설에 이어서 나오는 성경구절은 “그 뒤 사울의 딸 미칼에게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 (6.23)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미칼의 불임을 보도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다윗과 미칼이 더 이상 부부로서 생화라지 않았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다윗과 미칼의 문제는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가장 아프고 기분 나쁜 말을 내뱉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관계를 깨뜨리는 극단적인 말은 피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서로가 먼저 상대방을 사랑해 주고 끝까지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특별히 부부처럼 가장 친밀한 간계 안에서 서로 돌보아 주고 배려하고 헌신하면서 백년해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많은 부부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안타깝게도 관계를 끝장내곤 한다.

 

특히 삶이 힘들고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할 때 서로 힘이 되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대 경우가 허다하다. 사업에 실패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겪거나 갑자기 자식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상처를 주고받다가 파경에 이르고 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결혼생활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애써왔는데, 이런 큰 불행을 당한 마당에 이혼을 주저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파괴적 심정에서. 둘째, 불행의 원인을 상대방 탓으로 보고 계속해서 상대방을 원망함으로써. 1 이 두 가지 이유를 좀 더 들여다보면, 부부가 살아오면서 쌓인 상처 덩어리들이 예기치 못한 불행 앞에서 한 순간 폭발하면서 이혼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 본성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가운데 하나는 내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탓하며 화풀이를 하고, 그 사람에게 내가 겪는 고통과 같은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2

 

삶이 어려울 때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모든 일이 순조롭고 행복한데도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 최고의 시간이 순식간에 최악의 시간으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것은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파괴력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기를 아끼고 이해해 주는 상대방을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도 사소한 일로 어느 순간 평화를 잃어버리고 상대방과 충돌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지난날 사랑하는 사람한테 버림받은 체험이 있기에 지금 만나는 사람한테서도 버림받지 않을까, 자기가 상대방에게 부족하지는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불안해하며 염려한다. 이렇게 불안해하고 예민해지다 보니 마음의 평화는 깨어지고, 별것 아닌 것으로도 상대방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면서 다툰다.

이렇게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언제든 기회가 되면 표면으로 떠올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상처를 전달하면서 행복한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대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치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며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들이 짊어진 짐을 발견하고

신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 존 왓슨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상처를 인식조차 못한다. 나아가 자기 안에 상처가 있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무의식적으로 어떻게든 살아 남고자 하는 생존 본능에서 형성된 자기 합리화이지만 충만한 생을 살아가기에는 장애가 된다. 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살면서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한 세상은 현세에 없다. 버거운 삶 속에서, 또 자신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고의든 아니든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쏟아놓으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러니 적어도 내 편에서 다른 이에게 상처를 덜 주고, 또한 다른 이한테서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러한 길을 부단히 개척해야 한다. 특별히 치유되지 않은 지난날의 상처가 현재 나의 삶에 파괴적 영향을 주지 않도록 그 상처를 잘 돌보아야 한다.

용서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상처가 있다면 치유해 주시는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신 다음 ‘네 병이 나았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가 구원받았다.’ 는 말을 자주 하셨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곧 치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치유를 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나에게 상처 준 사람 또는 나 자신 그리고 상처 받은 상황을 용서하는 것이기에, 먼저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서로 가까이 다가앉자.

우리를 떼어놓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적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다만

불행하고 불쌍한 이들만 존재한다.

우리가 계속 누릴 수 있는 행복,

유일한 행복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서로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 로맹 롤랭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페 4,32)

 

 

1부  용서하기 위하여

 

그대의 원수에게는 용서를

그대의 적대자에게는 관용을

그대의 친구에게는 마음을

그대의 자녀에게는 모범을

그대의 부모에게는 효도를

그대 자신에게는 자기 존종을

인류에게는 박애를.

-  벨푸어

 

 

1.1  용서,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 두 가지를 들라면 그것은 죄를 안 짓는 것과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일 것이다. 조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기에 쉽사리 부서지는 존재다.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보지만 어느 고해신부도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또 죄를 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R.C. 스프라울 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그런데 죄를 안 짓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용서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체험으로 안다.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은 자연 그대로 살다가 아무 원한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런데 인간만은 그렇지 못하다.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다가 그대로 죽어 간다.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던 장사꾼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의 가게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들은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 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두 사람을 회해 시키려고 한쪽 상인에게 천사를 보내셨다.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리실 것이오.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자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주실 것이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천사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 경쟁자는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오. 그대가 금화 10개를 원하면 그는 금화 20개를 얻게 될 것이오.” 천사가 웃음을 지으면서 “이제는 화해하시오. 하느님은 이런 방법으로 그대에게 교훈을 주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상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제가 무엇을 바라든 다 그렇게 이뤄진다는 말씀이지요?” 하고 물었다. 천사가 그렇다고 하자 상인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3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옛말에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냇물에 새겨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사람들 대부분이 원한은 바위에 새기고 은혜는 냇물에 새긴다.

왜 용서하기가 어려운가?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이 분명 잘못했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나에게 상처 준 상대방을 용서한다는 것은 마치 상대방의 잘못된 행위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용서할 수 없다.

• 나에게 상처 준 상대방을 용서하면 그 사람은 아무 죄의식 없이 살아갈 텐데 공연히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 같아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 나에게 상처 준 상대방을 용서해 주면 내게 벌어진 비극을 되돌릴 길이 없다.

 

위에 언급한 이유들을 제쳐두고라도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해 주면 내 자존심을 회복할 길이 없다고 보기에.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달마 대사는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으니.’ 라고 한탄했다. 용서를 못하는 것은 마음이 상처를 받아 오그라들어 옹졸해진 탓이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 중 대다수는 한때 얼마나 다정한 사이였던가!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 산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는 드물다. 설령 상처를 주었다 해도 별로 개의치 않고 금방 잊어버린다. 하지만 내가 잘 아는 사람, 친한 사람이 준 상처는 쉽게 잊을 수 없다. 한때 다정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바늘조차 꽂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굳어지고 오그라든다.

어느 잡지에서 신년 특집으로 유명인사 몇 사람에게 새해 소망을 물으면서 한 가지 이상안 질문을 했다. 새해에 제발 죽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당돌한 질문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저 사람만 없어져 주면 모든 게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4 내게 상처를 안겨준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런 부정적 감정이 생기는 것이 보통 인간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 익명

출처 : 빈들
글쓴이 : 바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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