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강 유역에 비봉산성(飛鳳山城)
柳今烈
제천시 청풍면 옛 황석리 본동에서 남쪽으로 강 건너 비봉산성은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을 때 1999년도 산성의 답사기를 수록하면서 일부 내용을 첨언한 것이다. [일부 청풍지(淸風誌)를 참조하였다.]
【위치】
옛 청풍관아에서 남서쪽에 웅거한 비봉산에 관련한 문헌은 {증보문헌비고}에 비봉산(飛鳳山)은, “서남쪽 1리에 있다” 라고 기록했다.
1914년 청풍군이 제천군으로 통폐합될 때 청풍읍의 뒷산에 있는 비봉산의 이름을 인용하여 비봉면(飛鳳面)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1917년 일제강점기에 토지조사를 실시할 때 청풍면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비봉산을 중심으로 사방의 산자락에 남동쪽에 연곡리, 북쪽에 광의리, 북서쪽에 계산리, 서쪽에 양평리, 남서쪽에 도곡리, 남쪽에 대류리, 남동쪽에 신리 등의 7개 부락은 비봉산을 공유하고 있다.
청풍면 일대 지형도 [청풍강은 도화리에서 북진리까지 북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곡류하여 황석리 방향의 서쪽으로 성치산성에 이르러 다시 남쪽으로 곡류하여 흐르는 형상은 반월형이다. 백제의 고분으로 양평리 적석총, 도화리 적석총, 교리 적성총은 인근의 성곽과 연계성을 지닌다. 백제의 산성은 황석리 성치산성, 도화리 저성, 물태리 성열성, 성내리 청풍토성 등이며, 자연석으로 석축한 비봉산성과 대덕산성은 유물이 없어 시대를 구분할 수 없으나 삼국항쟁시대에 석축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가 백제의 강역인 청풍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남긴 유적은 계산리 적석총과 황석리 고분이다. 이러한 산성은 삼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에도 활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비봉산성의 8방이 가시권역으로 신라군이 문경의 계립령을 넘어 월악산을 경유하여 비봉산성 남쪽의 평야지대로 진격할 수 있는 직진로이다. 청풍강 유역에 산재한 적석총과 금수산에 산재한 성곽은 별도로 다루겠다. 백제시대 이후에도 고려시대의 풍부한 유물이 출토된 양평리 적석총의 일대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청풍강을 중심으로 비봉산의 남쪽으로 대류리, 연론리, 신리, 도곡리, 용복리 등은 기마병이 전투를 할 수 있는 광활한 지역이다. 특히 양평리 적석총에서 말방울이 출토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신담의 적석총은 강 건너 북진나루에서 마주하는 곳에 위치한 유적으로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청풍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적석총이 산재한 것이며, 산성이 대거 분포한 사실은 남한강 유역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청풍강은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동할 때 여울목으로 군사가 이동할 수 있는 지형 인근에 산성을 구축한 점은 진도(津渡)와 강안성(江岸城)의 공수(攻守)가 그 어느 지역에 비하여 견고하게 방어한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청풍면 일대 지형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봉산성(530.9m)의 특성은 8방을 관망할 수 천혜의 망대이다.
비봉산성을 중심으로 강 건너에 포진한 성곽은 비봉산 말미에 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고부소[曲沼]에 황석리 성치산성(346.2m), 비봉산 정북향에 대덕산성(475.8m)과 마주하고, 북동쪽으로 성내리에 청풍토성이 제천에서 진입하는 길목으로 막으며, 청풍면 도화리 입구에 저성(猪城)이 포진하고 있는 형국이다.
비봉산에서 강을 건너지 않은 산성은 동쪽으로 성열산성(333.6m)은 청풍의 치소(置所)를 수비하고, 그 동쪽으로 단령봉수(丹嶺烽燧)와 봉수로 연계하여 수산에 오치봉수, 단양에 소이산봉수와 죽령봉수로 통한다. 또한 오치봉수에서 심항산 봉수로 통한다.
봉수는 별도로 다루겠다.
청풍강을 중심으로 강안(江岸)의 양쪽에 성곽이 웅거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청풍강변을 중심으로 포진한 성곽들은 서로 연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황석리에 소재한 대덕산성이나 성치산성은 전략적인 요충지로 군사들이 장기간 주둔할 수 있는 수비의 성이요, 성열산성은 고대로부터 조선후기까지 도강의 격전장으로 수비와 공격을 겸비한 성곽이다.
청풍면 신리에 세운 비봉산 등산 안내도 [비봉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마을은 등산로의 등정코스가 상이하다. 비봉산 산자락의 둘레에 도로를 개설하여 시내버스가 신리, 연곡리, 광의리, 계산리, 양평리, 도곡리, 대류리를 한 바퀴 돌아서 청풍면소재지로 운행한다.]
청풍면 교리에서 본 비봉산과 대덕산 [청풍호 등산로에서 서향으로 비봉산(좌)과 대덕산(右)은 마주하는 산성이며, 정면에 성치산성이 자리한다.]
청풍문화재단지 성열성에서 본 비봉산 [비봉산은 보는 위치에 따라서 그 형상이 사뭇 다르다. 가장 뾰족한 부분이 동쪽으로 향한 봉두(鳳頭)이다.]
옛 교리에 가설한 수상공연장과 비봉산 [충주댐 수몰로 인하여 옛 청풍면소재지는 수몰되었으나 비봉산은 여전히 의구하다. 그 산하의 아름다운 풍광은 세계인의 놀이마당이 되었다.]
충주댐 수몰민 만남의 광장에서 본 비봉산과 대덕산 [조각품의 네모 안에 황석리 성치산성의 위치가 희미하게 보인다.]
청풍호의 수경분수와 비봉산 [충북 도민의 발전과 화합을 상징한 수경분수는 비봉산을 배경으로 한 폭의 명화를 연출한다.]
【비봉산성의 답사동기】
황석리에 소재한 대덕산성, 성치산성을 답사하여 성터의 잔해를 살펴보았으나 강 건너 비봉산은 가깝고도 멀었다.
비봉산은 강 건너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등정을 하지 못했다.
다만 눈만 뜨면 남향에 위치한 비봉산을 바라보며 성장했기 때문에 친근한 산이다.
황석리에서 남향에 비봉산 [충주댐으로 수몰된 황석리는 청풍호수를 이루면서 낚시터가 되었다.]
황석리 삽작골에서 본 비봉산 [청풍호에 드리운 비봉산은 마름모형을 연출한다.]
비봉산을 답사한 동기는 도봉공(道峰公) 류흥문(柳興文, 1833~1916)의 비봉산(飛峰山)의 제영을 보면서 비봉산에 성곽이 소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봉산(飛峰山)-
飛鳳欲飛不遇風(비봉욕비불우풍) 비봉이 날고자 하니 바람을 만나지 못해,
至今留在海之東(지금유재해지동) 이제까지 바다 동쪽에 머물러 있네.
石爲骨格層層白(석위골격층층백) 돌이 골격이 되어 층층으로 휘고,
花似羽毛箇箇紅(화사우모개개홍) 꽃은 깃털과 같이 낱낱이 붉었네.
麓長其脛蹲千載(록장기경준천재) 산기슭은 그 종갱이와 같이 길어서 천년을 걸터앉았고,
峰擧爾頭挿半空(봉거이두삽반공) 봉우리는 너의 머리를 들어서 반공에 솟았네.
高巖特立城臯上(고암특립성고상) 높은 바위가 우뚝이 성언덕에 섰으니,
儼若求凰望此中(엄약구봉망차중) 엄연하기가 암봉황을 구하는 그 같음을 이 가운데서 바라보겠네.
라는 시에서 비봉산의 석봉에 우뚝 솟은 성(城)의 시구를 접하고 언제고 비봉산 산성을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봉산(飛鳳山)은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봉황(鳳凰)이 날아 갈 듯한 형상이라 하여 ‘비봉산(飛鳳山)’이라 한다.
특히 황석리에서 비봉산을 바라볼 때 완전한 봉황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는데, 예로부터 비봉산을 황석팔경(黃石八景)으로 손꼽았다.
{증보문헌비고}에 “비봉산 봉우리의 형상이 높고 준엄하며 끝이 묘하다. 위에는 샘이 나와 맛이 지극히 맑고 차갑다.” 라고 기록했다.
충주댐 수몰전 황석뜰은 32만여 평의 광활한 옥토로 한강을 끼고 있고, 지형적으로 볼 때 금수산, 대덕산, 성치산, 비봉산이 감싸 안은 장방형이다. 그 사이에 한강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질러 흘렀다.
옛 청풍강역에 살았던 선조들은 기름진 옥토와 강과 산이 조화를 이룬 천혜의 자연과 강역을 수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의 구축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비봉산의 등정기(登頂記)】
성곽의 답사는 봄철에 해야 한다는 이치를 터득했다.
왜냐하면 여름철은 녹음이 짙어 성곽의 잔해를 찾을 수 없음이요, 가을철도 낙엽이 있고, 겨울철에는 해가 짧기 때문이다.
봄철은 낙엽과 잡초가 없기 때문에 사진촬영에 장애가 없고, 낮과 밤의 길이가 같기 때문에 청명(淸明)한 날만 선택하면 성지 답사의 길일(吉日)이다.
1999년 3월 16일이 쾌청한 날씨라는 일기예보를 접했다.
이날 아침 원주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제천에서 청풍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갈아탔다.
시내버스에서 한 노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분은 수산면 고명리 산다고 했으며 존함은 묻지 앉았다.
외모의 모습은 남루하고 수염은 더부룩하다.
그는 한학과 자연의 이치를 섭렵한 지인(知人)으로 박학다식했다.
그는 산을 볼 때는 포란법(抱卵法)을 보라고 말했다.
곧 안을 포(抱)자, 알 란(卵)자의 합성어로 ‘山이 알을 품에 안는다.’ 또는 ‘山이 모든 형상을 포용한다.’ 라는 뜻이다.
나는 택시기사에게 비봉산 등정한다니까 연곡리 마을까지 데려다 주었다.
도보로 소요시간은 40분 정도이다.
택시비는 3,000원이다.
처음 오르는 길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비봉산은 알을 품고 있는 닭의 형상이다.
지인의 말처럼 포란법을 응용하면 산을 머리, 가슴, 다리 등을 갖춘 동물을 연상하면서 생각해 보았다.
비봉산은 이름 그대로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억지로 포란법(抱卵法)을 대입하지 않아도 익히 알 수 있는 형상이다.
비봉산은 동쪽에 머리를 두고 청풍호(淸風湖)를 포용한 형국이다.
비봉산의 등산로는 7개리가 공유했기 때문에 오르는 길이 각기 다르다.
연곡리의 등산로는 산의 정수리로 올라가는 곳으로 가장 가파르다.
연곡리 마을에서 출발한 시각은 12시 32분이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 가다 보면 대형 우사가 보인다.
소들은 눈망울이 나의 발걸음에 시선을 놓지 않으며 여린 목소리로 ‘움메’ 소리를 낸다.
내 뒤에도 40~50대의 남녀 등산객들이 비봉산의 등정길에 오른다.
이미 비봉산은 산악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곳부터 경사가 완만한 능선의 등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오르면 중턱에 묘소 한 기가 있다.
이곳에서 잠시 쉬고 오르는데 경사가 대략 30°로 가파르다.
등산로의 양쪽에는 낙엽송, 물푸레나무, 소나무, 참나무 등이 우거져 나무를 붙잡고 오를 수 있었다.
나무가 우거져 나뭇잎에 토사가 유출이 안되어 등산로는 돌부리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 위로 솔잎이 떨어져 있었다.
한 등산객은, “해방되던 해 서울에서도 솔잎으로 불쏘시개를 했다.” 라고 말한다.
모두들 가파른 길에 힘이 들고 숨이 가쁜 모습으로 멈추어 뒤돌아보며 한숨 쉬면서 경관의 수려함에 감탄한다.
연곡리 비봉산 등산로 [충주댐으로 이주한 연곡리에서 서쪽으로 등산로를 따라서 비봉산으로 정상부에 오른다.]
연곡리에서 비봉산에 등산하는 모습 [비봉산의 산자락에 7개 마을은 각기 사방에 산재하여 등정하는 길이 다르다.]
연곡리와 광의리로 갈리는 지점에 광의리는 1.35㎞, 연곡리는 1.55㎞ 표지판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연곡리, 성열성, 청풍문화재단지, 청풍호, 금수산 등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봉산 정상까지는 0.15㎞를 더 오르면 된다.
정상에 이르니 시각은 1시 30분 이였다.
연곡리에서 정상까지 1시간 소요된 셈이다.
우리나라에 1시간 등산코스에 이토록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란 없으리라!
한 등산객은, “아! 진짜 푸르네! 다른 호수보다 더~파랗네!” 라고 감탄한다.
나는 정상을 둘러보며 말을 잊었다.
더 이상 오를 것도 없다.
사방팔방에는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장쾌하게 둘러서 위용을 자랑하듯 솟아있다.
등산객들은 셔터를 연실 눌러대며 비경을 담는다.
그리고 말없이 아름다움에 도취된 채 사방을 응시하며 하산준비를 한다.
한 등산객은, “시원하고 바람 불고 경치 좋은데 좀 쉬었다 가지 뭐!” 하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한 눈에 들어오는 경관(景觀)은 경관이 아니다.
8방(八方)의 풍광(風光)을 어찌 한 눈에 볼 수 있으리까?
걸림이 없다.
자연이 빚어낸 천하의 걸작품으로 무아지경이다.
돌부리에 걸터앉아 나침반을 놓았다.
천하를 군림하는 듯한 위용에 필설은 가당치 않다.
【비봉산에서 읊은 시】
①청풍명월남도원(淸風明月南道元)
비봉산(飛鳳山)남도의 으뜸이라 청풍명월이라 하였거늘
비봉산에 오르지 않으면 문인이 아니리
누대에 기대 봉황을 읊조리던 묵객이여
창공에 나는 봉황의 뜻을 뉘 알리오
②봉황(鳳凰)의 나래를 타고
비봉산(飛鳳山) 반공(半空)에 올랐어라
산상(山上)의 산울림에 허공으로 솟구솟네
황석뜰에 창랑 일어 그리던 벗 어디서 찾을꼬
北으로 대덕산 능선이 눈알에 멎으니
단숨에 뭍속으로 달려가건만 백년 빈(賓)이네
東北의 준령에 제천이 한눈에 보이니
이제야 높은 줄 알겠구려
東으로 금수산이 병풍 두르니
비단물결 넘실넘실 너만이 흥겹구나
東南에 도화동이 무릉도원 이루니
학봉은 너울너울 물장구치네
南으로 월악산은 하늘을 찌르니
청풍호 섬섬이 월악을 떠받드네
西南에 충주가 아른거리니
가야금 소리 실려올 듯 하여라
西로는 성치산에 물길이 굽이도니
유수(流水)에 풍상을 뉘가 말리리
北西로 밧치재 굽이 길 체기를 뚫은 듯
산너머 인걸은 숨돌리겠구려
사방팔방(四方八方)이 비봉에 읍(揖)조리니 신선이구려
오호라 월출(月出)의 모습은 어떨까
항아(姮娥)를 사모한 정 깊기만 한데
오늘은 비봉의 정수리에 술상 차리고
청풍호에 담긴 술항아리를 비우리라.
【비봉산 정상의 형상】
비봉산을 안내하는 표지판에 높이는 531m이다.
비봉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광의리 1.5㎞, 연곡리 1.7㎞, 서쪽으로 광의리 1.2㎞, 계산리 1.8㎞, 남쪽으로 대류리 1.5㎞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정상에는 토양이 없고 암반이 솟구쳤다.
옛 문헌에는 샘물이 있다고 했으나 샘물은 없다.
돌봉우리의 너비는 대략 4m이며 길이는 대략 55m로 동서방향으로 길게 늘어져 석교(石橋)를 건너는 느낌이다.
비봉상 정상에 세운 등산로의 표지판 [비봉산의 정상에 세운 이정표의 맞은편에 대덕산이 보인다.]
비봉산 정상에 세운 산불감시 전망대 [비봉산은 사방의 가시권역은 천혜의 망대에 산불감시초소를 세웠다.]
비봉산성에서 바라본 대덕산성 [제천의 북쪽 방면에 군사와 기마가 이동할 수 있는 관방로에 대덕산성에서 망대의 역할을 하며, 성내리에서 청풍강에 인접한 곳에 청풍토성의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했다.]
비봉산성에서 바라본 성치산성 [출전 : 청풍지] [비봉산성에서 북서쪽에 자리한 성치산성을 굽어 볼 수 있다. 비봉산성은 강북지역은 물론 배후지역까지 원근거리에 적군의 동태를 관망할 수 있는 천혜의 망대이다.]
비봉산 중턱에서 본 연곡리와 성열성 [출전 : 내제문화] [비봉산에서 정동쪽으로 망월산(望月山)의 서쪽에 성열성이 있으며, 강 건너 학현리는 단양 적성산성에서 도강하여 매포를 경유하여 학고개[鶴峴]를 넘어서 남한강으로 진격할 수 요새에 저성의 진지를 구축하였다. 또한 저성은 도화리의 강변에 적성총에서 강나루를 건너 죽령(竹嶺), 계립령(鷄立嶺), 모녀치(毛女峙)로 통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비봉산성의 조사】
비봉산 정상부의 산불감시 전망대에서 산불 감시요원 한 명이 통신을 교신하고 있었다.
정상의 돌부리에 앉아서 옛 살던 고향을 관망하다가 먼저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계산리 방면에 성지를 살펴보았다.
1) 서향성벽(西向城壁)
비봉산 전망대에서 서쪽방향으로 30m 지점에 성터가 있다.
이 지점까지는 경사가 완만하다.
현존한 성의 길이는 21.5m이며, 축성에 사용된 재료는 주변의 크고 작은 자연석의 막돌로 석축하였다.
그리고 잔존한 성의 높이는 붕괴되어 정확한 높이와 폭은 실측하기가 애매하다.
그 중에 가장 높은 성벽은 1m 10㎝이며, 폭은 자연석을 자연스럽게 포개어 석축하였다.
서방향 성벽 [양평리 방면으로 일부 석축의 잔해가 보인다.]
서벽 중 가장 높은 성벽 [서쪽에서 비봉산성으로 등정하는 능선에 석축한 부분이 견고하게 남아있다.]
2) 북향성벽(北向城壁)
비봉산 봉우리에서 북쪽방향은 서쪽 성지에서부터 동쪽 성벽에 이르기까지 직경으로 105m 가량이다.
이 방향은 청풍호를 관망할 수 있는데 산 아래는 급경사이며, 게다가 산봉우리 바로 아래는 90°암벽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어 천연 요새로 성곽을 구축할 필요성 없는 천혜의 자연성벽이다.
3) 남향성벽(南向城壁)
동남향에 현존한 성벽의 길이는 대략 15m에 불과하다.
이 성벽은 동문지에 연계되었으므로 동문지에 포함시켰다.
남향은 대체로 비알이 심한 편이다.
그리고 자연석이 땅속에 박힌 돌이 많고, 동문지나 서문지에 비해 폭넓게 자연석이 분포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성을 구축할 때 사용한 돌들이 분포되어 있다.
아마도 남향의 성벽은 붕괴로 돌들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성벽이 멸실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남향의 특징은 경사도가 동서방향에 비해 심한 편이다.
4) 동향성벽(東向城壁)
연곡리에서 비봉산 정상에 오르면 이곳이 성터의 관문임을 알 수 있다.
성을 쌓을 때 사용한 돌들을 가지고 돌탑을 쌓았다.
이 관문은 아군이 능선을 따라 정상을 왕래했던 동문지(東門址)로 추정되므로 ‘동문지(東門址)’라고 칭했다.
이 성문을 올라 올 때 우측으로부터 산성이 동남향으로 현존해 있다.
이곳부터 비봉산의 정상으로 볼 수 있다.
단지 이 관문부터 50m까지는 최고 정상에 비해 약간 경사가 지면서 지형이 낮다.
이 관문부터 서향 성벽까지 직경으로 105m이다.
비봉산성 동문지(東門址) [연곡리에서 비봉산성으로 출입하는 문지는 훼손하여 한쪽으로 석축을 치운 모습이다. 이 모습은 윗면에서 아랫쪽으로 촬영한 것이다.]
동방향 성벽 [동쪽의 문지는 훼손되었으나 자연석으로 석축한 일부분은 견고하게 남아있다.]
현재 동향 30m와 동남향 15m의 성벽 길이는 총 45m가 잔존해 있다.
동문지의 성벽은 서문지 성벽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자연석으로 축성했기 때문에 높이와 폭을 정밀하게 검측할 수 없다.
동문지 성벽 가운데 가장 높은 성벽은 대략 1m 60㎝에 이른다.
동벽 중 가장 높은 성벽 [동벽 가운데 지면에서 가장 높은 석축이다. 주변에 산림이 우거졌으나 성축은 훼손되지 않았다.]
동남향 성벽 [동남쪽의 회절부에 성벽으로 경사도가 심하지 않은 지역이다.]
비봉산성의 개략도 [비봉산성의 정상부는 암반으로 동서로 길게 뻗고, 최고봉의 폭이 4m로 협소하며, 동서쪽으로 폭이 넓어진 장구형이다.]
【비봉산성의 규모와 역할】
비봉산성은 축성연대와 성곽의 목적에 대하여 정확하게 실증할 수는 없으나 산성에 오르면 8방(八方)이 가시권에 들어와 적의 침입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망루대(望樓臺) 겸 통신수단의 성으로서 봉수 역할을 했던 봉수대(熢燧臺)를 갖춘 성이였음을 감지할 수 있다.
비봉산성의 유형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성벽을 구축한 산정식(山頂式) 산성(山城)이다.
다만 한강을 향한 북향은 철옹성 같은 암벽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성을 구축할 필요성이 없었다.
남향에는 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들이 널려 있어 북향을 제외하고 산봉우리를 에워싼 산성이다.
이 성에서 유물이 출토된 바도 없고, 문헌의 상세한 기록도 없으므로 어느 시대에 축성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자연석을 있는 그대로 포개어 싼 형태의 축성기법으로 보아서 초기철기시대나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론한다.
이 성의 북쪽에 계산리에 고구려 고분을 발굴조사하였다.
비봉산성의 면적을 환산하면, 동문지와 서문지까지 직경이 105m이며, 전망대는 남북으로 4m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문지는 현존한 성벽의 길이 21.5m이며, 동문지의 성벽은 45m 가운데 15m는 동남향이므로 동벽의 길이는 30m이다.
오차의 범위가 다소 있더라도 평면적을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①동서길이 105m×전망대 부분 중심의 남북길이 4m = 420㎡이다.
②서문지에서 전망대 30m×서문지 성벽 17.5m(21.5m-4m)=525㎡/2 = 262.5㎡이다.
③동문지에서 전망대 75m×동문지 성벽 26m(30m-4m) = 1,950㎡/2 = 975㎡이다.
①+②+③을 더하면, 420㎡+262.5㎡+975㎡=1657.5㎡이다.
이를 평(坪)으로 환산하면 501평이다.
상기 면적을 환산한 이유는 군사적 목적인 수비의 성(城)인지, 보루(堡壘)인지, 군사용 망루대(望樓臺)인지, 통신수단의 봉수대(烽燧臺)인지 논증하기 위함이다.
비봉산성의 평면적은 501평이지만 상상봉은 암반으로 이루어 졌고, 상상봉을 중심으로 동서의 성벽까지의 길이는 활처럼 경사가 졌기 때문에 실제 부지 면적은 협소하다.
만약에 군사들이 주둔을 했다면 성내에 군기고와 창고시설, 막사 등이 건립될 부지가 필요하다.
그러한 가용면적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군사들이 주둔하여 수비의 성으로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적의 침입을 사전에 발견하는 망루대 겸 통신수단으로 봉수대의 기능을 가진 보루로 추론된다.
【비봉산성의 보존제안】
비봉산성은 이 지역 일대 통신의 첨병초소 임을 확증이나 하듯이 지금도 원두막 같은 망루대에서 산불감시를 하고 있다.
비봉산정은 제천시내가 한 눈에 목격될 만큼 가시권은 광활하다.
누구나 비봉산 정상에 오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리라 확신한다.
다시 오르고 싶은 비경의 산이다.
내 생각은, ①비봉산성을 복원하고 봉수대를 재현하여 관방유적자원화 ②유료 망원경을 설치로 등정객이 비경을 관찰 ③현대적인 첨단 설비를 갖춘 망루대를 구축하여 별자리 관측소 설치 ④비봉산성과 대덕산성에 구름다리를 만들어 호연지기의 요람지로 승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비봉산의 전설】
비봉산의 산자락에 주민들에게 신령스런 영산(靈山)으로 산의 형세가 봉황의 날개를 펴며 비상하려는 형국이다.
일제초기에 한 중국인이 나타나 비봉산에 등정한 다음에 비봉산 정상에서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날자 이상히 여긴 주민들이 산에 올랐다.
일제시대 산꼭대기에 쇠말뚝을 박았는데, 주민이 뽑아서 회관에 두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산에 올라 보니, 산 중턱에다 그 중국인이 묘지를 만들어 제를 올렸던 음식 때문에 까마귀가 몰려 온 것을 주민들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후 신령을 모시는 산에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날아가는 봉의 날개 자리에다 개인의 묘지를 만들고 장군석까지 놓았던 그 후손들은 모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었다고 전한다.
【비봉산성의 활공장】
1999년 필자가 답사할 당시는 순수하게 등산객이 청풍호 산하의 비경을 감상하기 위하여 등산했다.
이후 제천시청 보도 자료에 의하면, “2005년 1월 12일 철탑 등 지장물이 없고 주변의 활공여건이 최적지인 청풍면 광의리 비봉산 정상에 300평 규모의 비봉산활공장이 들어선다. 총 6억원이 투자되는 비봉산활공장사업은 5월까지 실시설계를 마치고 6월 착공하여 2006년까지 2년에 거쳐 조성할 계획으로 활공장, 주차장, 선착장, 장비이동용 모노레일 등의 시설을 갖춰 다양한 레포츠 동호 인구를 유입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 보도에 이어서 비봉산의 성지(城址)에 활공장을 수립하여 모노레일을 탑승하는 편익의 레포츠 시설을 갖추었다.
비봉산성의 역사적인 유적은 인위적인 발상으로 인하여 성곽의 복원은 요원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성곽의 복원과 더불어 레포츠 시설을 겸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柳今烈 謹記]
'바람을 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년 10월 27일 오후 09:21 (0) | 2011.10.27 |
---|---|
하나투어 가이드는 자기팀 외의 사람은 자기해설을 들으면 안된다네. (0) | 2011.10.27 |
캐슬렉스 (0) | 2011.08.10 |
박수절벽이라던가? 장미 같은 바위들이 신기해다. (0) | 2011.08.07 |
안덕계곡의 신비 속으로 (0) | 2011.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