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실

[스크랩] `고결한 삶과 장렬한 죽음에 부합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마가렛나라 2009. 9. 21. 08:36

"제3차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

- 한국천주교회의 창설 주역 가운데 권일신 · 권철신 · 이승훈에 대한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대하여"

2009년 9월 19일 (토) 09:00~18:00

수원교구 정자동 주교좌 성당 1층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

 

 수도자, 성작자, 신학생을 위시하여 후손들 140여명을 포함하여 800여명이 성당을 가득 메우고를 경청하는 가운데 6편의 논문과 논평, 종합토론으로 이어진 날 세미나에 관해서는 앞으로 언론을 통해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리라 여겨집니다.

 저는 우리 직암회의 직접적인 관심사항인 직암 권일신 성조에 대한 부분만 우선의 궁금증을 해소해 드리고자 간략하게 발췌해서 옮깁니다. 직암회원 약 30여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이날 점심식사와 간식은 후손들이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서종태 박사(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의 발제 논문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중에서

 

 다음으로 권일신의 학문에 대해 살펴보았다. 권일신은 문학을 좋아했던 아버지 권암, 장인인 안정복, 안정복의 문인인 이인섭, 이병휴의 제자인 이기양, 형인 권철신 등의 밑에서 두루 수학하였다. 이들 여러 스승들 가운데 학문적으로 영향을 많이 준 사람들은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새로운 사상체계를 모색하던 이기양과 권철신이었다. 그는 형 권철신의 학문 전반을 그대로 따랐다.

 

 또한 권일신은 교회의 지도자로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우선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주역이 되었고, 1786년 가성직제도 설정 때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789년 말에 북경교회에 밀사를 파견할 때 우리나라 교회를 대표하여 북경으로 보내는 서한을 이승훈과 각각 한 통씩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785년 추조적발사건과 1791년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으로 교회 창설의 주역인 이벽과 이승훈이 교회를 멀리할 때에도 흔들림 없이 홀로 교회에 남아 난국을 헤쳐 나갔다. 이러한 점에서 권일신은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안정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공로가 크다고 하겠다.

 

 

 박광용 교수(가톨릭대학교)의 발제 논문

사료를 통한 권철신 ·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중에서

 

 권일신의 경우,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당시의 ‘교주’로서 고발되어서, ‘금지사무사술’조의 적용 여부를 놓고 심문을 받았다. 심문 과정에서 권일신은 ‘교주’란 자기에게 당치도 않다고 항변하였고, 다만 ‘예수’의 추종자로서 처벌한다면, 그 처벌은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자세를 일관되게 지켜냈으므로 그렇게 판결이 내려졌고, 그 자세에 대한 처벌로 마지막 심문에서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혹형을 면치 못했다고 판단된다.

 

 

 조광 교수(고려대 한국사학과)의 논평문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에 대한 논평’ 중에서

 

 권철신과 권일신의 죽음은 조상제사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의 전통문화와 孝에 대한 지극한 인식에 대한 당시 교회의 몰이해라는 문제점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고민했고, 인간 본성에 따라 자신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孝라는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다. 그들은 18세기 교회의 부적절한 선교신학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의 탄생을 기적적(mirabiliter) 사실로 인식했다. 권철신과 권일신은 기적의 주인공이었다. 이 기적의 주인공들은 당시 잘못된 선교신학의 희생물이 되었고, 죽음을 강요당했다. 이 기적의 주인공들이 순교했느냐 배교했느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18세기 선교신학의 관념에 매어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논의 자체는 그들의 기적적 행동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이제는 이 논의를 그만둘 때도 되었다.

 

 기적의 주인공인 그들은 이미 성인일 수 있다. 교회 권위에 의한 시복과 시성의 선언은 그들이 순교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한국에 그리스도교적 구원의 단초를 열어준 기적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어야 한다. 이 원칙은 李檗, 李承薰과 같은 초기 교회의 인물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기적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존경받아야 마땅할 기적의 주인공들이었다.

 

 

 최인각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 총무)의  발제 논문

 ‘창설주역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 - 권일신 · 권철신 · 이승훈을 중심으로-' 중에서

 

 무엇보다 교회법적으로 배교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부 포기한 것”을 말한다. 배교라는 것은 신앙 자체를 아주 부정하고 거부하면서, 남은 일생을 꾸준히 무신론자의 생활과 비신앙활동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결국 背敎란 마음과 몸으로 꾸준히 계속하여(contumaciter)신앙을 거부하는 생활과 활동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교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본인의 판단으로는 권일신 · 권철신 · 이승훈이 선택한 길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모두를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정순황후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살 수 있고, 천주학을 믿는 이들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그들도 보호하고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되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하느님의 큰 가르침(살리라는 뜻)에 부응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의 영성은 바로 우리 모두를 살리는 상생의 영성을 닮고 한생을 마감한 교회의 지도자임이 드러나고 있다.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의 심문 내용과 결안문을 보면, 표면상으로 신앙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그들이 신앙을 부정하고 배교하였는가?’를 반문하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박해자들이 세 사람에 대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겉으로만 그렇게 행동한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해자들 자신들마저 이 세 사람의 진술문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훈의 최후에 관한 박해자들의 기록과 권일신과 권철신의 최후에 관한 가문의 최고본 족보(1807년의 木版本 安東權氏 族譜)에 잘 나타나 있다.

 본인은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의 진술에 대해 허위진술, 혹은 묵비권 행사 등으로 특정지었다. 이들은 심문 중, 이미 밝혀진 사실이나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외의 사실들에 대해서는 허위진술과 묵비권 행사로 일관하였다.

 이를 고찰하면서 본인이 숙고한 점은 ‘왜 세 사람이 심문 과정 중 허위진술과 묵비권 행사를 했는가?’ 하는 점이다. 보통 순교자들의 경우, 간단명료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데 반해, 조선 천주교회 최고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태도는 오늘의 우리가 보아도 의아한 점이 있다. 본인은 이 점에 대해 당시 사회의 상황과 조선 신앙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로서, 성직자가 전무(全無)하던 시대의 평신도 사목자로서의 한국 교회를 대표한, 이 세 분의 교회 안에서의 위치를 고려하였다. 즉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평신도 사목자로서 최선의, 최고의 본분이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양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데 있다는 평신도 지도자의 근본 요건에 대해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이들은 신자들에게 미치는 자신들의 영향력과 조선 천주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염두에 두고, 단순히 자신들이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자라고 인정하는 것이 가져올 해악을 생각해야만 했다. 이러한 인정은 신자들에 대한 고발이며, 조선 천주교회 조직의 와해를 초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교자라는 자신의 명예의 실추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해자들은 이들 평신도 지도자들이 지닌 신앙에 대한 증오심도 있었지만, 이들을 엄벌하므로써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하려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얻으려는 최종의 목적을 갖고 있었으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끝까지 추궁하고 심문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황의 해석을 통해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의 순교평판에 대해 교회법적인 평가의 기반을 삼은 것이다. 이들은 조선 천주교회에 성직자가 없던 당시 평신도 사목자로서의 본분, 곧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며, 교회를 유지하는 직무에 충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보여준 태도는 이들이 가지고 있던 천주에 대한 신앙, 나라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그리고 사목자로서 하느님 백성에 대한 사랑이 모두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상생의 철학과 영성’을 갖고 있던 이들이었다. 즉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은 자신도 살리고, 부모도, 임금도, 성직자와 신자를 모두 살리기 위한 철저한 삶을 살다가, 박해자에 의해 죽음을 당한 한국초기 천주교회의 지도자이며 순교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심상태 몬시뇰(수원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의 발제 논문 

‘이승훈 · 권철신 · 권일신의 죽음과 순교 문제 재조명’ 중에서

 

 권일신이 한국 천주교회 창설을 주도한 3대 인물 중 한 지도자로 꼽히면서도 신해박해(辛亥迫害) 당시 천주교 ‘교주’로 고발당하고 체포되어 형조에서 심문을 받고 제주도 귀양 판결을 받고 떠나기 전 갑작스레 진행된 회유에 굴복하는 뜻이 담긴 ‘회오문’을 제출함으로써 배교하였기에 순교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머물러 있다. 권일신의 죽음에 대한 교계 연구자들은 그의 순교 죽음 직전에 일어난 ‘비겁한 죽음’ 앞에서 한결같이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는데 머물러 있다.

 

 이벽의 죽음을 재조명하는 연구물에서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구원에 필요한 신앙은 ‘신앙대상’(fides quae creditur)과 ‘신앙행위’(fides qua creditur)의 두 차원에서 논의될 사안인데, ‘신앙대상’은 ‘범주적 신앙’ 차원으로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이나, 교리나 성사활동 등 다른 사회집단 내지 종교들과 구별되어 드러나는 ‘명시적 차원의 신앙’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서 ‘신앙행위’는 ‘초월적 신앙’ 차원으로서 신앙인이 현실 안에서 살아가면서 내면 심층에서 들리거나 발해지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일상적으로 성취하는 윤리 도덕적 생활로 구현되는 신앙’을 가리킨다. 그런데, 배교나 순교를 가리는 사안에서 일차적으로 관건이 되는 신앙은 ‘범주적 신앙’보다 ‘초월적 신앙’이다. 예수의 다음 말씀은 이 사실을 확인하여 준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범주적신앙’!]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초월적 신앙’!](마태 7,21). 특정 종교의 교리를 명시적으로 신봉하지는 않으면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익명적 양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로 간주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논자는 그를 죽음에로 이끈 엄형이 가혹하게 가해지는 가운데 이루어진 7차 심문 과정까지 예수님께 대한 명시적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권일신은 ‘범주적 양식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을 간직하면서 받게 된 제주 귀양 판결 후 하늘의 뜻에 따라 80노모께 대한 효도를 다하여 인간답게 살 것을 종용한 정조의 뜻에 순응함으로써 익명의 양식으로 이루어진 ‘초월적 신앙’도 성취한 뒤에 예산 귀양으로 감형 받고 나서 즉시 닥친 죽음을 맞았다고 보기에 순교로 신앙적 삶을 마쳤다고 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믿는다.

 

 논자는, 그들이 평소에 보여준 것으로 알려진, 고결한 인품과 치열한 진리 탐구, 그리고 모범적 덕성 함양 노력들을 염두에 둘 때에, 협박과 함께 가해지는 심문관들의 질문을 받고 나서 고립무원의 처절한 상태에서 발해진 진술들이 그 당시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들려진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보여준, 익명의 양식으로 드러낸 신앙의 진술로 이해한다는 입장을 개진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다른 신도들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대역부도죄인으로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지거나, 66세의 고령에도 장형(杖刑)을 받아 매 맞다가 운명하거나, 50세에 받은 장100도에 해당하는 엄형을 받은 끝에 삶을 마쳐야 했다. 모두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한 일들이었다. 일부 연구자들이 강조하듯, 이들은 모두 숭고한 순교자들로 인정받아 마땅한 죽음을 맞은 분들이었다.

 

 치열하기 그지없는 구도적 삶을 영위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증거 했던 교회 선조들의 위대한 삶을 올바로 규명하고 검토하면서 보편 교회 안에서 그분들의 삶에 부합하는 자리를 마련해 드리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는 일은 후손들로서 등한히 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될 과업이라고 믿는다. 한국 교회 창설 주역들인 이승훈 · 권철신 · 권일신 세분들의 치열했던 구도적 도정을 뒤 밟아 따르면서 가혹하기 그지없던 박해의 역경을 겪으면서 지키려 했던 신앙 때문에 끝냈던 삶이 미처 이룩하지 못한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의미에서 그분들의 고결한 삶과 장렬한 죽음에 부합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우리 후손 모두 적극 동참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마지않는다.

출처 : 직암선교회
글쓴이 : base cam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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