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유스토)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서 자살한 신자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전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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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를 위한 장례식과 전례의 발전
데이비드 파워(워싱턴 가톨릭 대학 전례학 교수)
자살자에 대해서는 장례식과 위령미사도 금지하던 시대의 사목자들은 교회법과 장례예식이 개정된 오늘까지도 자살자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어떻게 해야할지 의문스러워 한다. 이 글은 교회법의 개정, 그리스도교 장례예식의 의미 그리고 새 장례예식 등에 대하여 논함으로써 그러한 의문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사제 한 분이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과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교구 당국은 그렇게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그 장례식에 참석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던 사람을 잃었다는 것과 그가 생애를 그런 식으로 끝냈다는 것이 더 큰 비극이었다. 주교는 이 장례식을 집전하고 강론을 했다. 그는 고인의 일기를 낭독함으로써 고인이 상당한 기간 동안 그 행위에 대하여 숙고했다는 것을 밝히게 되었다. 어떤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그는 목숨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주교는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았고 다만 조객들에게 고인의 심적고통을 이해하고 그가 종말을 앞두고 괴로워하던 날들을 슬퍼하자고 권고했다. 그는 고인의 부모에게 아들이 행한 선업을 기억하도록 강조했고 교구의 사제들이 그들을 돌봐줄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삶과 죽음의 주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강조했다.
30년 전에는 이러한 광경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 사제은 비밀리에 매장되고 말았을 것이고, 그 죽음의 사연은 베일에 감춰지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살자에게 그리스도교 장례식을 베푸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사실 자살이 어떤 때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깊게 생각하고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건을 우리가 외면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어떤 가톨릭 신자들은 특수한 상황의 자살에 대해서 윤리적 정당성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심하고 있다. 아직도 소수의 사람들은 자살자에 대한 그리스도교 장례식을 언짢게 생각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은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으려 하며, 다만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I. 교회법
1917년 교회법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의 장례식과 연미사를 금지했다. 자살자는 교회의 장례식이 금지된 사람들의 목록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교자, 이단자, 열교자, 프리메이슨(Freemason)단원, 파문된 자, 결투로 죽은자, 자기 시체의 화장을 요청한 자들과 함께 다루어졌다. 그 목록은 드러난 죄인들에 대한 장례금지와 추문을 피하는 것에 대한 포괄적인 구절로 끝난다. 1983년의 새법전에는 사실상 이러한 법이 없어졌지만 교회의 장례식을 거절해야 할 대상자들의 목록은 죄의 형태에 따라 많이 변경되었다. 특기해야 할 것은 결투자와 자살자에 대한 언급이 삭제된 것이다. 결투자가 삭제된 것은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이고, 자살자가 삭제된 것은 그들에 대한 판단을 피하려는 의도에서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자살행위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을 인정하려는 뜻은 아니다. 자살의 심리적 상황과 동기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뜻에서일 것이다.
II. 그리스도교 장례식의 의미
자살자에게도 교회의 장례식을 거행해주는 뜻을 분명히 이해하려면 먼저 가톨릭 장례예식의 의미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예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많이 개정되었다. 공의회로부터 전례의 재검토가 촉구되기 이전의 그리스도교 장례식은 연도와 사죄경을 염하는 행위(사도예절)로 거행되었는데, 이것은 중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예절이다. 교회의 권위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행사되는 것과 동등하게 죽은 사람에게도 행사되었다. 죽은이의 관 위에 염하는 사죄경도 고백자에 대한 사죄경과 동등했다. 미사를 통하여 사제가 죽은이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와 보속을 베푸는 것은 교회의 권한을 무덤에까지 확대하여 행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신학자들은 죽은이를 위하여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산 이를 위한 미사처럼)성사의 사효적(事效的 ex opere operato)효과와 동등한 효과가 있는지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지 계속해서 논쟁을 벌여왔지만, 소수의 학자들은 사제가 교회의 봉사자로서의 능력으로 죽은이를 위하여 미사를 봉헌할 만한 권한이 있는지 의심해왔다. 이러한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려면 교회의 봉사자는, 마치 죄인을 어느 정도 올바르게 판단함으로써만 고해소에서 사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죽은 사람의 생활과 죽음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요구된다.
장례식에서 표현되는 마음자세는 현세의 생활에 따라 사후의 생활이 좌우된다는 확실한 우주관에서 취해졌다. 교회의 성사를 받는 것은 은총,대죄,소죄의 구분과 관계되었기 때문에 죽은이에 대한 교회의 성사집행도 천당,지옥,연옥이라는 세가지 구분과 관련되었다. 교회는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16,19)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굳게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과 교회의 판단이 일치하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윤리에서도 그와 동등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살아있는 동안 교회의 성사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던 사람이면 교회 장례식에서도 제외되었다. 이단자,열교자,배교자는 살아서나 죽어서도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살을 시도해서 미수에 그친 자는 파문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살아있는 동안 어떠한 교회직무에서도 제외되었고 성직자일 경우에는 성직이 박탈될 정도의 중죄로 취급되었다. 자살을 시도하여 성공했으면 교회는 그를 더이상 교회의 직무에 의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로 판단하였다. 그렇게 죽은 사람에게 미사의 공로를 베풀거나 그 관 위에 사죄경을 염하는 것은 그러한 교회의 확신을 어기는 것이었다.
III. 새 장례예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반적인 전례개혁의 일환으로 장례예식도 개정되었다. 새 장례예식은 부활의 희망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죽은 사람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 유족들을 위로하는 데에도 지향을 두고 있다. 이제는 관위에 사죄경을 염하는 사도예절이 아니고 죽은이를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고별식을 행하게 된 것이다.
이 예절은 영혼을 깨끗이 하는 예식으로 알아들을 것이 아니다. 영혼의 정화는 오히려 미사성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별식은 시체를 발인하기 전에 혹은 매장하기 전에 교우들 단체가 마지막으로 떠나는 형제에게 인사하는 예식인 것이다.
이 예절중에 집전자는 죽은이가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판과 죄의 용서를 받아 마지막 부활에 참여하도록 기도한 서품聖品을 받지 않은 교역자가 장례식을 집전하는 곳에서도 이 예절과 기도가 장례예식에 포함되고 있다. 장례예식에 이 고별식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죽음과 사후에 대한, 또는 죽은이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전혀 새로운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례의 발전과정에서 과거의 태도를 반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도 새 전례 전체에서 발견되는 여러가지 경우처럼 모호한 점이 없지 않다. 한편으로, 교회가 죽은 사람의 죄를 사해준다거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내리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희망하는 목표는 죽은 영혼을 연옥에서 빨리 해방시키려는데 있지 않고 마지막 부활때에 모두 만나 일치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사로써 죽은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씻어준다고 하는 사제의 권한에 대한 구시대적 신앙이 아직도 다소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은이에 대한 심판을 내리는 것 같은 요소를 제거했다는 것, 이것이 옛 전례에서 새 전례로 발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달리 말해서, 자살자의 장례에 관련해서 그들을 기억하는 그리스도교 전례의 거행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자살자의 윤리성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단지 교회가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는 것일 뿐이다.
IV. 사후에 갈 곳
1.
상술한 바에서 자살자에 대한 윤리적 인정이나 거부가 그리스도교 장례식거행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충분히 밝혀진 것 같다. 사람이 자살할 때에 가졌던 정신상태와 책임감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지만 살았을 때 교회의 구성원이었던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교 예식에 따라 묻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식은 유연성있게 그리고 상황에 따르는 모호함도 인정하면서 거행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개정된 장례예식에 대한 불평 중의 하나는 죽은이의 부활에 대해서 대부분 너무 추정적인 것 같다는 것이다. 옛 예식에 관련되는 연옥과 심판에 대한 우울한 상상을 제거하려는 노력에서 새 예식서 편찬위원들은 사람이 죽으면 직접 그리스도의 부활에 완전히 참여하게 된다고 가정하고서 작업을 한 것 같다. 그래서 장례식은 가끔 침묵중에도 환희의 분위기를 유지하지만, 유족들은 아직도 작은 방에서 망인의 영혼의 거처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근심하고 있다.
문화적으로 볼 때, 이것은 죽음에 대한 오늘날의 태도와는 아직도 거리가 먼 것 같다. 서양에서는 죽음을 위장하려 하고 죽음의 실상과 목적에 대하여 미화하려는 경향은 가끔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에 대한 불확실성-가톨릭 신자들도 잘 모르는 그 불확실성을 극복해 보려는 표현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포착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 직접 들어갈 사람들로 생각했다. 드러난 죄인은 우주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갈 사람들이었고, 그외의 다른 죽은 모든이는 마지막 부활을 기다리며 쉬는 곳에 들어갈 사람들로 생각했다. 그 중에 어떤 영혼들은 안식을 얻을때까지 무덤뒤에서 마귀와 싸우고 있으므로 그들을 돕기 위해서 장례예절에서 죽은이를 위한 기도를 바친다고 생각했다. 중세기에는 이러한 사상으로 인하여 두 가지 결과가 생겨났다. 첫째로 순교자들 뿐 아니라 죽은 모든 이가 지복직관至福直觀(visio beatifica)에 직접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세상 종말에 오는 부활의 문제는 덜 중요시되었다. 둘째는, 쉬는 곳을 정화하는 곳으로서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죽은이의 생애에 부족된 점이 있어 걱정이 되던 유족들은 연옥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우주관은 앞으로 오래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부활의 기쁨에 대한 희망을 너무 쉽게 가짐으로서 죽은이에 대한 걱정이 없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유를 들어 비교해볼 수 있겠다. 모든 지방을 분명하게 표시해 놓은 지도에 의하여 정확하게 진로를 계획하는 사람과 미로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사후 문제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사상을 비교해보자. 미로에는 방향이 없어 흩어져 있는 발자국들, 방향을 돌려놓은 표지판,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길만이 있다. 출구를 찾는 사람은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서 모든 골목을 다 헤맨다. 그는 모든 기억을 되살려서 길을 찾으려고 골목 하나하나에 표시를 해둔다. 그러나 좌절과 공포로 그 표새해둔 기억을 되살리는데 실패하면 길을 잃고 만다.
2. 사후에 갈곳
만일 죽은이를 위한 예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이 사후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걱정하는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인다면 위치표시가 정확지 못한 지도를 가지고 세운 계획처럼 될 것이다. 이러한 비유로 볼 때 중세기의 것은 위치표시가 정확한 지도였다. 즉 전례의 예식과 상징들로써 정확한 지도처럼 산이와 죽은이가 각자 가야할 곳을 분명하게 정해줌으로써 그들이 찾아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표시하게 되었다.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지도 위에 사람들의 자리를 정해줌으로써 이 세상에서 모든 모호함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치 못한 지도는 미로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어떤 명령을 받고 떠나더라도 그러한 지도를 가지고 있으면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전례의 예식과 상징이 그러한 지도 위에 그려진 것이라면 모든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해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예식과 상징들은 오히려 살아있을 때 행했던 부족한 점과 훌륭한 점들 사이에 갈등을 가져올 것이다. 하느님의 불가시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알 수 있는 것에 의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바로 우리가 미로에서 찾는 출구이며, 따라서 인생의 여정은 그 자비와 사랑이 바로 우리가 미로에서 찾는 출구이며, 따라서 인생의 여정은 그 자비와 사랑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가족들은 고인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놓고 얼마나 몸부림쳤고 사랑을 찾고 좌절과 싸웠는지를 생각하면서 고인의 이 투쟁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맡겨 드린다. 이것은 산이와 죽은이가 함께 연합하여 출구를 찾고 투쟁한다는 뜻이 된다. 즉 모든이가 공통된 희망으로 일치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심판의 알 수 없는 출구를 찾아 내는 데 동참하는 것이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황청 경신성은 자살자의 경우에도 "각 망인의 인물됨과 그 죽은 환경 뿐 아니라 그 가족들의 슬픔과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친절히 염려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은이를 기억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그의 삶의 몸부림과 죽음에 대한 갈등이 결국 자살로 끝났다는 의미에 대해서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의 장례예식은 그리스도의 부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순간까지 죽음의 세력과 싸우신 그 분의 투쟁을 상기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이 투쟁에서의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연대성을 설명하는 것이 부활의 기쁨 안에서의 그분과 우리와의 연대성을 설명해 주는 것보다 더 유가족의 마음에 깊이 닿을 것이다. 실제로 삶의 의미에 대한 불명료와 갈등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하게 되었을 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고뇌에 그리스도께서 참여하신다는 그 연대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V. 결론
우리는 교회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보고 말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더욱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생활의 여러 분야에서도 이런 점을 볼 수 있다. 교의는 그 결정적 본성에 따라, 비록 역설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역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표하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 주님의 현존을 인정하는데 있어서 부재한다는 반대주장을 현존한다는 위로와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참회의 성사에서 죄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땅에서 맺는 것과 하늘에서 맺는 것을 항상 완전히 일치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고해사제나 교황청도 잘 알고 있다. 달리 말해서, 어느 경우에도 상징을 통하여 드러난 것도 많고 가려진 것도 많으므로 교황청도 그러한 불확실성을 이해하는 태도를 배워가고 있다.
사실 이러한 교회의 불확실성은 의심과 혼돈을 조장하기보다 하느님의 동고同苦(compassion)을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초로 하여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해준다. 죽음과 투쟁할 때 우리는 투쟁하고 몸부림치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연대성을 기억함으로써 거기에서 희망의 기초를 발견하게 된다. 자살로 끝나버린 하나의 생명을 생각하면서 거행하는 장례예식은 오히려 교회를 위해서도 깊이 숙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불확실성 안에서 예수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의 연대성을 기억함으로써 교회의 올바른 태도를 발견하겠기 때문이다.
출처: 사목전망
출처 :성 이냐시오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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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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