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성덕에 나아가는 방법 우리는 성덕(聖德)에 나아가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성덕에 나아가서 성인 성녀가 된 분들의 삶의 경험을 되살려 보며 성숙한 신앙자세를 체득해 나가도록 하자. 1) 양심성찰(良心省察)을 매일 할 것 정확한 자기 진단없이 영적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양심성찰은 장사하는 사람이 매일 수지계산을 철저히 하고 내일의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다. 맹목적인 수련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걸음만 옮기는 것과 같다.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당황하고, 불필요한 수고로 심신을 피로케 하여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는 날마다 신중하고 세밀한 자기 반성을 하여야 한다. 이 양심성찰은 고해성사의 성찰과 달리 범죄한 사실만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과의 관계를 반성한다. 하루의 생활을 반성하는 요령은 다음과 같다. - 오늘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 느낀 때는? -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누구였는가? - 그에게서 무엇을 얻었는가? - 오늘 나의 실수와 결점은 무엇이었나? 왜? 어떻게? - 나의 기질이 어떻게 드러났는가? - 나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했는가? - 나의 지력과 의지력은 어떻게 사용했는가? - 어제보다 진보한 것은? - 특히 요즈음 실천하려고 애쓰는 덕행은 잘 실천되었는가? - 내일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덕행의 진보를 위해서 자주 떨어지는 결점에 대하여 특별히 성찰하고 실패의 원인을 알아내어 그와 반대되는 덕행을 실천하면 빠른 속도로 진보할 수 있다. 양심성찰에서 특히 주의할 것은 진보가 있었다고 자만하지 않으며 실패했다고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과 자신 앞에서 솔직담백하되 핑계를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2) 극기생활을 할 것 고해성사로써 죄의 용서를 받지만 악의 뿌리인 악습과 기질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극기(克己)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극기에 대한 명백하고 엄숙한 단언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갈라 5,24)라고 말하며,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1고린 9,25-27)라고 자신의 경험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행복선언의 정신을 따라 자신을 제어(制御)하면서 살아야 한다. 3) 고해성사와 영적 지도를 받을 것 고해성사의 직접목적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지만 간접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악습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즉 단점을 제거하고 내적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고해성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일정한 신부에게 규칙적으로[한 달에 한 번] 고백하되 자기의 악습과 결점까지 고백하여 지도를 받아야 한다[3편 5장 참고]. 4) 성체를 자주 영할 것 세례성사로써 얻은 새로운 생명을 튼튼하게 기르기 위해서 성체성사가 필요하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명실공히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주기 때문에 완덕에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이 성사에 참여하기를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음식물은 이것을 먹는 사람의 살과 피로 변화하지만 성체는 이를 먹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변화가 자주 되풀이됨으로써 사랑의 일치에 이를 수 있다. 즉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희생제사를 드리며 자기의 몸과 영혼을 하느님께 바친다. 이 봉헌은 주 예수의 몸을 자기 안에 모심으로써 보다 더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몸과 피로 변화시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심으로써 우리의 제사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의 효과를 그대로 받게 되고, 우리는 영성체로써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므로 참된 일치가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최후만찬[성체성사 설정]을 마치시고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셨듯이 우리도 영성체 때에 희생과 각오를 새롭게 다져야 한다. 즉 완덕의 길이 험하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극기가 어렵다 해도 예수님과 함께라면 서슴지 않고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이러한 정신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조배를 한다면, 우리는 점점 하느님의 뜻을 쉽게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일치하여 사도 바오로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5) 기도생활을 할 것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은 투철한 기도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최후목적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기도라는 대화의 수단으로써 하느님과의 친교를 다져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루가 5,16). 3년 동안의 짧은 공생활 기록인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루가 18,1)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 7,7-8)라고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기를 명하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만나는 사람을 닮게 마련이다. 우리가 기도 중에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크심을 자주 대하게 되면 우리의 지혜, 의지, 감정도 성화되고 순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하느님 닮기를 포기한 사람이라 하겠다.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찬미, 하느님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한 속죄[뉘우침과 결심], 자기가 바라는 간청과 간구, 이렇게 넷으로 구성된다. 이를 요약하면 흠숭과 청원이다. 한갓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작음을 스스로 깨닫고 크신 분께 흠숭과 찬미를 드리고 자신의 작음과 무능을 하소연함은 마땅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의 전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후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구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훌륭한 기도의 자세는 그 자체가 좋은 기도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 12,30)는 말씀이 우리의 기도에서 잘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성과 의지와 감정과 몸과 생활을 총동원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야말로 참으로 좋은 기도이다. 즉 지성과 의지만 내세워 냉랭해서도 안 되고 감정에 치우쳐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서도 안 된다. 단정한 몸가짐과 바른 생활이 따르지 않을 때 좋은 기도를 계속할 수 없고 바른 지성과 의지가 없이는 옳은 생활을 계속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입으로만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야 하고, 기분에 따라 하느님을 찾아서도 안 되며, 하느님을 철학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정성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묵상기도 1편 4장 3절 참고]. 6) 피정(避靜)을 정기적으로 할 것 피정이란 소란스런 세속을 피해서 고요함을 찾는 것이란 뜻으로 일정기간[2,3일 혹은 40일까지도] 동안 조용한 곳에서 묵상기도를 하는 영적 수업(修業)이다. 즉 하느님 앞에서 자기 일상생활의 생각과 마음가짐과 말과 행위가 바람직하게 발전되어 가고 있는지 전면적인 자기 반성을 하고, 옳지 못한 생활 태도나 그릇된 습관을 시정하고 하느님과 그 섭리를 더 깊이 깨달아 신앙생활 전반을 혁신하는 것이다. 피정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에 따라 개인적으로 할 수도 있고 단체적으로 할 수도 있다. 피정에 익숙하지 못한 신자는 개인적으로 하는 것보다 단체적으로 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본당 혹은 단체에서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피정에 참여함이 좋다. 특수한 운동체들(꾸르실료, 부부일치운동[M.E], 공동체묵상, 성령쇄신 등)이 피정을 실시하고 있는데 본당신부의 지도에 따라 자기에게 알맞는 것을 선택함이 중요하다. 정기적으로 해마다 피정에 임하여 종합적인 자기 반성을 하고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여 내적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받는다면 수덕생활에 놀라운 향상이 있을 것이다. 7) 이웃사랑을 실천할 것 성덕에 나아가려는 사람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22,39)는 애덕을 등한히 할 수 없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생기고, 또한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기르고 강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서로 한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로마 12,9-20). 이렇게 이웃사랑은 원수사랑에까지 발전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교에서 발견되는 영웅적 애덕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3-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