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악이엄마
-이시임 안나(1782~1816년)-
찔레꽃, 수선화가 피었다 지고 지금 여기 접시꽃이 피고 있다. 꽃이 지듯 목숨이 진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들의 이름 위에 붉은 꽃을 따서 문지르면 붉은 피가 돌아오고 푸른 꽃을 따서 문지르면 푸른 숨이 돌아올까... 살면서 종종 자신의 입장을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으며 관계가 뒤틀릴 때, 한국가톨릭 초기 순교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옛날 얘기와도 같은 그분들의 삶은 마음을 울리며 내 편에서 두 발짝 뒤로 물러설 여유를 선물해준다. ’종악이엄마‘라고 불린 이시임 안나 복녀님의 이야기는 지인 Lee선생으로부터 오래 전 경북 영양 지방에 내려오는 ’천주학쟁이 종악이엄마‘ 라는 이야기로 먼저 들었다.
종악이엄마, ’이시임 안나 (1782~1816년)‘는 충청도 덕산의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 내포지방에 퍼져나가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자 깊이 마음이 끌렸다. 그녀의 집안은 본래 무관으로 이름이 났으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는 고향을 떠나며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요한)는 이시임 안나의 오빠였다.
이시임 안나의 부친은 처음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과 딸이 천주학에 빠져 목숨이 위태로우면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곤 했는데, 이사를 할 때마다 재산이 줄어들 수 밖에 없자 자식들을 원망했다. 하지만 죽기 2년 전 비로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시임 안나는 명민하고 어여쁜 처녀였다. 천주교의 교리를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동정녀로 살 길을 찾고 있었다. 나이가 찬 처녀가 시집을 가지 않으려 하자 가족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천주학쟁이로 의심을 받으며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이 생기자 이시임 안나는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섰다. 이때 교우 뱃사공 박씨가 그녀를 동정녀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이 뱃사공은 그녀와 함께 있게 되자 마음이 달라져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몇 해 안되어 사망하고 그녀는 종악이를 혼자 길러야만 했다.
과부가 된 후에도 이시임 안나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또 언제부턴가 신자들이 모여 사는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내포의 천주교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충북, 경북 지방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그쪽으로 이사하여 살았던 같다, 이곳에서 그녀는 1815년 을해박해를 당해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시임 안나는 안동으로 끌려갔다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지냈다. 그러는 사이 네 살 먹은 아들 종악이가 감옥 안에서 죽는 괴로움을 겪는다.
너무 어려 제 이름자도 쓸 줄 모르는 네 살 배기 종악이가,
엄마 곁에만 따라다니느라 아직 길도 못 찾는 종악이가,
삶은 물론 죽음이 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는 종악이가,
엄마가 밥을 하면 바라보며 웃던 종악이가,
밥상을 받으면 좋아서 작은 손으로 박수를 치던 종악이가,
엄마 손도 안잡고 혼자서 포르르 산새처럼 날아가 버렸다.
이시임 안나는 아들을 잃고 비로소 성모님의 고통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후기, 천주학이 이 땅에 들어올 당시 대다수 순교자들의 형편은 살만해서 사는 게 아니었다. 죽음보다 나을 게 없는 삶을 사는 이들이 허다했을 것이다. 이시임 안나는 아들 종악이를 잃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 아이가 어디선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을 것 같아 어서 종악이가 헤매고 있는 곳으로 달려 가고픈 마음이었을 것이다. 감옥 안에서 마음껏 먹여보지도 입혀보지도 못한 아들이었다. 하늘을 향한 원망이 가슴에 차올랐으리라. 그럼에도 하늘 아버지가 아들 종악이의 영혼을 저버리지 않을 걸 믿음으로 기도하며 희망했을 그녀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하루하루, 엄마를 찾고 있을 아들 곁으로 달려 갈 결심으로 순교의 날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많은 순교자들이 마지막 생사가 갈리는 기로에서 세상을 향한 미련과 회한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생명은 살고자 하는 게 본능이니까. 그러나 이시임 안나는 4살 짜리 아들 종악이가 기다리는 저 세상으로 건너가야만 하는 입장이었을테니 차라리 사는 일이 더 극한의 순교였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내포교회사연구소가 기록한 이시임 안나 복녀의 기록은 생몰연대와 그녀의 집안, 아들 종악이의 죽음을 담담히 말하고 있지만 이시임 안나의 마음 속에서 회오리쳤을 감정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고운 모습으로 단아한 삶을 찾아 동정녀공동체를 찾아 나섰다 원치 않는 결혼에 이어 아들의 출산 그리고 남편의 죽음 이어진 아들의 죽음으로 그녀는 풍파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본 자리는 늘 하나 하늘 아버지를 향한 갈망이었다. 경북 영양 지방에 내려오는 이시임 안나 종악이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설명이 덧붙는다. 박해가 시작되어 대구 감영 포졸들이 영양으로 들어와 교우촌의 신자들을 잡아가는 걸 멀리서 보게 된 이시임 안나는 도망가는 대신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포졸들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자신도 천주학도라며 잡아가기를 청했다고 한다. 그녀의 눈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선한 삶을 사는 이들이 바로 천주학도들이었으므로, 천주학도들이 따르는 선한 하느님을 믿고 자신과 아들의 운명을 하느님께 맡겨드렸을 것이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너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너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네 누이·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으며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이날 밤 열시쯤에 비가 왔다.(이순신의 ”난중일기“ 임진 난 중 어느 해11월 22일 일기)”
<난중일기>를 읽으며 인간 이순신과 자주 만나지만 아들을 잃고 부하의 소금막에 가서 혼자 울었다는 부분과 여기 이 기록은 자식을 잃은 이들의 아픔이 클로즈업되는 글이다. 이시임 안나의 심정 나아가 성모님의 심정을 더욱 선명히 이해하게 해준다.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잃으셨다. 성모님도 아들을 잃었다. 그분들이 이시임 안나와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모른다면 오랜 세월 그분들 이름을 부르며 위로를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후기 민인들의 세상은 이시임 안나의 처지와 오십보 백보였을 것이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조선천주교는 이러한 조선후기 생존의 장에서 비롯한 면도 없지 않았다. 조선후기는 서학으로든 동학으로든 새 길을 내야만 하는 정황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판결을 내리지 않다가 약 1년 6개월이 지난 뒤에야 임금의 재가를 얻었다. 이때 대구 감사는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신자들을 형장으로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종용하였는데, 이에 대한 이시임 안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예수와 마리아께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그들과 같이 천국으로 올라가자 하시는데, 어떻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안나는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당시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순교 후 그녀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이시임 안나는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일도 힘에 겨워 ’살아가는 길‘에 대해 무심해지는데, 지금보다 더 열악한 처지였을 초기 천주교신자들은 ’살아가는 길‘에 대해 깊은 고민을 거듭한 이들이었다. 그런 고민을 거쳐 천주학을 따르다 그 길 위에서 많은 분들이 죽음을 당했다. 법적으로도 현실에서도 불평등이 당연한 이 세상에서 '불'자를 떼어내기 위한 분투이기도 했지만 생명이란 단지 지상에서 숨쉬는 물질적 차원만은 아니라는 믿음 위에서 사랑, 사람의 길을 걸어간 그분들을 돌아보는 일은 늘 독한 술에 취한 듯 한동안 마음을 사로잡힌 기분에 잠긴다.
순교자들의 영혼은 예수와 마리아가 사는 선한 세상으로 옮겨 갔을까?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홀리 바디로 바뀌어 살아가는 세계가 존재하느냐 여부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불확정성의 주체가 객체를 결정하는 물리의 세계, 소립자의 세계에서 보면 유기물질과 무기물질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측면과 뉴턴의 역학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들도 상대성의 세계를 통해 존재 가능한 차원으로 이해하며 우리의 인식은 확정적인 말을 하기에는 너무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깊어진다.
믿음은 별이라서 어둔 밤을 밝히는 별이라서 사람 사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될 생필품이이라고 해야 할 듯. 우리들 내면의 어둠을 밝히는 법등(法燈)이 바로 믿음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