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목적

성주본당은

마가렛나라 2013. 6. 20. 09:24

저는 구교집안에서 자랐어요.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침에는 지금처럼 짧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과라는 기도를 하는데 지금의 예수성심호칭기도를 다해야 했어요. 저녁에는 만과 즉 저녁기도를 하는데 지금의 성모호칭기도까지 다해야 했기 때문에 바쁜 학생으로서 힘들었지요.ㅎㅎ 그래도 안하고 갈 수 없었어요. 저의 오대손 할아버지 그러니까 고조부님부터 증조부님은 물론이고 지금은 저의 손자손녀도 모두 가톨릭이니까 구교중의 구교집안이지요? ㅎㅎㅎ

가톨릭대사전에 보면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 2동에 소재하고 있는 대구 대교구 관할 본당이다. 1890년 이 곳 산막골(성주읍 성산 3동)에 주필학(야고버)이 칠곡 낙산성당에서 세례를 받아 선교를 시작하여 1917년 4월에 자기 사재를 털어 산막골에 공소를 건립하여 그 당시 프랑스 신부인 투르뇌(Victor Tourneux)신부의 지도를 받았다. 투르뇌 신부는 190 3년 입국하여 전남 목포,

   나주 노안지방에 전교하다가 1911년 경북 가실(낙산) 본당으로 부임한 분이다. 투르뇌 신부의 헌신적인 활동과 교우들의 열성으로 신자수는 급증하여 6.25 동란이 나던 해인 1950년 3월 19일 본당으로 승격하였고 김재석(요셉) 신부가 첫 주임신부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후 왕묵도 신부 등 역대 6명의 신부가 본당을 이끌어 오고 있으며 성모회 등 단체가 조직되어 있다. 현재 성주읍과 선남면. 용암면, 원항면, 대가면 등 4개 면에 9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으며 1983년 말 현재 신자수는 3,599명(남 1,553명, 여 2,046명)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우리집이 공소였다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성주본당이 되었어요'

그래서 늘 보고 듣고 생활한 것이 가톨릭적이었어요.

옛날에는 밤중부터 공심재를 지켜야했고 판공성사때는 꼭 찰고를 받아야했는데 그때에는 교리문답을 외워서 답했습니다. 검은색으로 문답과 흰색으로된 문답이 있었고 검은색은 반드시 외우지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어요.그때는 머리에 아주 큰 모자를 쓰신 수녀님들이 계셨는데 지금 보니까 샤르트르 바오로회수녀님들이시더군요.

어머니께서 조과만과를 안하면 얼마나 무섭게 야단을 치셨는지 모릅니다.

기도하다 졸면 머리에 꿀밤을 먹이시고.....  ㅎㅎ

 

그렇게 자란 사람이라 시를 쓰는데 당연히 가톨릭적 사고의 영향을 받지요.

사랑이나 용서, 자비와 이해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