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3500m에 위치하는 라닥의 어느 수도원의 동굴에 한 승려가 고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타쉬’입니다. 3년째 명상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머리는 길어서 어깨까지 내려오고 손톱과 발톱은 마음껏 자라서 마치 동물의 그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때 고행 기간이 끝나 감에 따라 그의 스승과 동료 승려가 동굴에 도착합니다. 오랜 명상을 끝낸 타쉬의 손과 발과 온몸은 거의 굳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정성껏 씻겨 주고 손톱과 발톱도 잘라주며 머리까지 깎아줍니다.
일행들이 그를 싣고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폐허가 된 사원을 지납니다. 그곳의 돌무더기에 쓰인 문구를 우연히 주인공은 보게 됩니다. 그 돌에는 티벳어로 다음과 같이 씌어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사원으로 돌아온 타쉬는 3년간 고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라마교 최고의 입문식에 참여하고 고위직까지 받게 됩니다. 그 행사날에 축제가 벌어지는 데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젊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광경입니다. 생전 처음 그런 장면을 목격한 타쉬는 그 이후로 매사가 의욕이 없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그의 도반 승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힙니다. 아마도 이후로 전개될 험난한 인생 여로가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화된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원에서는 마을 축제에 참여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마을 축제에서 운명적인 여인과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보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뒤틀려지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런 현상을 눈치 챈 그의 스승이 타쉬를 어느 묵언 정진 중인 고명한 승려에게 보냅니다. 그 승려는 동굴 속에서 정진하고 있었는데 타쉬가 오자마자 알아채고 그림을 내밉니다. 그림 속에는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약간 기울어 보면 해골로 변하는 신기한 그림입니다. 모든 애욕이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로 된 액자도 보여줍니다. 그 액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이 글을 보고 타쉬는 부리나케 되돌아와 그의 스승에게 따지듯이 묻습니다. 부처님도 29세까지는 속세에서 사셨고, 깨우침도 속세의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5세 때부터 속세를 떠나 부처님같이 살아왔지만, 부처님 같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행 후 온다던 자유와 금욕 후의 만족감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할 것도 있지만, 포기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지요.”라고 말하면서 사원을 떠나게 됩니다. 환속하게 된 것입니다.
떠돌이로 나서면서 찾아간 곳이 전에 마을 축제할 때 눈이 마주쳤던 처녀의 집입니다. 추수할 때까지 일을 도와주기로 한 것입니다. 결국, 처녀와 결혼하게 되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일이라는 것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곳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상 욕망에 물들어가는 타쉬는 수행자의 모습이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속세의 인물로 변하였습니다.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하여 일꾼을 줄이자고 말하는가 하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여자 일꾼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범부보다 더 못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도반이었던 친구 승려가 방문하였습니다. 스승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의 편지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난 삼사라를 향해 귀의하게 됐구나. 우린 다시 꼭 만날 것이다. 우리가 재회하는 그날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겠지.”
스승의 편지를 받고 난 후 타쉬는 반성하게 됩니다.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아왔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욕망을 죽이고자 그렇게 수행했던 것이 다 허사였다는 옛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 욕망을 정복하기 위해 수행을 다시 하기로 합니다.
타쉬는 아내와 아이가 잠든 사이에 집을 떠나게 됩니다. 마치 부처님이 야소다라 왕비와 아들 라훌라를 남겨두고 떠나듯이 새벽에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삭발하고 승복을 걸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참 길을 걷던 중 어느 무너진 오래된 사원 앞에 다다르자 놀랍게도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야소다라 왕비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그 왕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하여 질타합니다.
“당신이 불도를 사랑한 열정이 내게 보여준 사랑만큼만 강했어도 당신은 지금 이 현세에서 부처가 됐을 거예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욕망을 이겨내지도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타쉬의 모습을 질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타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아내는 염주가 든 단지를 남편에게 주고 가버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쉬는 절규하게 됩니다. 땅을 뒹굴며 절규하다 잠이 들게 되고 잠에서 깨어나자 눈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3년간 명상을 마치고 난 후 사원으로 가던 길에 보았던 바로 그 돌이었습니다.
그 돌에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돌리자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이 글을 보고 타쉬는 짙푸른 창공을 쳐다보게 됩니다. 창공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출처: ‘영화이야기-삼사라’, 다음 카페, ‘따밥사모’]
일행들이 그를 싣고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폐허가 된 사원을 지납니다. 그곳의 돌무더기에 쓰인 문구를 우연히 주인공은 보게 됩니다. 그 돌에는 티벳어로 다음과 같이 씌어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사원으로 돌아온 타쉬는 3년간 고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라마교 최고의 입문식에 참여하고 고위직까지 받게 됩니다. 그 행사날에 축제가 벌어지는 데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젊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광경입니다. 생전 처음 그런 장면을 목격한 타쉬는 그 이후로 매사가 의욕이 없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그의 도반 승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힙니다. 아마도 이후로 전개될 험난한 인생 여로가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화된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원에서는 마을 축제에 참여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마을 축제에서 운명적인 여인과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보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뒤틀려지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런 현상을 눈치 챈 그의 스승이 타쉬를 어느 묵언 정진 중인 고명한 승려에게 보냅니다. 그 승려는 동굴 속에서 정진하고 있었는데 타쉬가 오자마자 알아채고 그림을 내밉니다. 그림 속에는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약간 기울어 보면 해골로 변하는 신기한 그림입니다. 모든 애욕이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로 된 액자도 보여줍니다. 그 액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이 글을 보고 타쉬는 부리나케 되돌아와 그의 스승에게 따지듯이 묻습니다. 부처님도 29세까지는 속세에서 사셨고, 깨우침도 속세의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5세 때부터 속세를 떠나 부처님같이 살아왔지만, 부처님 같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행 후 온다던 자유와 금욕 후의 만족감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할 것도 있지만, 포기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지요.”라고 말하면서 사원을 떠나게 됩니다. 환속하게 된 것입니다.
떠돌이로 나서면서 찾아간 곳이 전에 마을 축제할 때 눈이 마주쳤던 처녀의 집입니다. 추수할 때까지 일을 도와주기로 한 것입니다. 결국, 처녀와 결혼하게 되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일이라는 것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곳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상 욕망에 물들어가는 타쉬는 수행자의 모습이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속세의 인물로 변하였습니다.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하여 일꾼을 줄이자고 말하는가 하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여자 일꾼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범부보다 더 못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도반이었던 친구 승려가 방문하였습니다. 스승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의 편지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난 삼사라를 향해 귀의하게 됐구나. 우린 다시 꼭 만날 것이다. 우리가 재회하는 그날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겠지.”
스승의 편지를 받고 난 후 타쉬는 반성하게 됩니다.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아왔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욕망을 죽이고자 그렇게 수행했던 것이 다 허사였다는 옛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 욕망을 정복하기 위해 수행을 다시 하기로 합니다.
타쉬는 아내와 아이가 잠든 사이에 집을 떠나게 됩니다. 마치 부처님이 야소다라 왕비와 아들 라훌라를 남겨두고 떠나듯이 새벽에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삭발하고 승복을 걸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참 길을 걷던 중 어느 무너진 오래된 사원 앞에 다다르자 놀랍게도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야소다라 왕비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그 왕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하여 질타합니다.
“당신이 불도를 사랑한 열정이 내게 보여준 사랑만큼만 강했어도 당신은 지금 이 현세에서 부처가 됐을 거예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욕망을 이겨내지도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타쉬의 모습을 질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타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아내는 염주가 든 단지를 남편에게 주고 가버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쉬는 절규하게 됩니다. 땅을 뒹굴며 절규하다 잠이 들게 되고 잠에서 깨어나자 눈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3년간 명상을 마치고 난 후 사원으로 가던 길에 보았던 바로 그 돌이었습니다.
그 돌에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돌리자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이 글을 보고 타쉬는 짙푸른 창공을 쳐다보게 됩니다. 창공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출처: ‘영화이야기-삼사라’, 다음 카페, ‘따밥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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