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목성지
춥다고 웅크리고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
게다가 그 전전날이 아가다 축일이었습니다.
빈들 가족이신 아가다 1000님의 축일을 팔부내 축일로 정하고 ㅎㅎㅎ
축하해드릴겸 멍에목성지를 다녀오자고 리나형님과 결정을 하고 출발했습니다.
멍에목 성지를 구글 지도로 검색을 하고 달렸더니
하, 하, 하,
네비는 청주교구청에 데려다놓고 목적지 부근이라니....
다시 검색하여
깊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니 아름다운 알프스마을이 나오고
그 속에 성지가 숨어있었습니다.
이 동네를 구병마을이라고 하네요.
찾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성지는 이제 한창 터를 닦고 있는 형편이라
텅빈 들판이었고
우리는 사제관에 들려서 주임신분임과 만나 성지소식을 들었습니다.
복지담당하시던 신부님께서 작년 9월에 발령을 받아 오셨답니다.
사제관 응접실을 경당으로 꾸며 살고 계시는데
난방이 잘 안되어서 군불을 떼는데 연기가 신부님 침실로 들어와서
선풍기로 연기를 내쫓고 계셨습니다.
너무나 소박하고 조촐한 침실
난방이 잘 안되어서 방안에서 텐트를 치고 사시더군요.
마음이 어찌나 아픈지....
잠시 기도를 하고 신부님의 안수를 받고
우리는 그곳을 떠났습니다.
신부님께서 자상하시게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배가 고프겠냐고 하시면서
손님으로 오신 수녀님께 라면을 끓여달라고 하시겠다는것을
우리는 맛있는 축일식사를 한다고 했더니
가까운 곳에 금바우 식당이 있다고 소개도 해주시고
친절하시게도 전화까지 하셔서 부탁을 해주셨습니다.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그 유명한 정이품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너무 늙어서 왼쪽 팔은 대수술로 잘라지고 없었습니다.
그것도 보니 마음이 아프더군요.
사람이나 식물이나 세월가면 늙고 병드나 봅니다. ㅎㅎㅎ
금바우식당은 송이백숙이 전문이었습니다.
송이버섯이 들어간 토종닭이라 맛도 좋았지만
송이버섯 향도 좋았습니다.
주인이 신자이신데다가 신부님의 전화를 받으셨다면서
친절히 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 공소가 보였습니다.
하개공소라는 아주 작은 공소입니다.
공소입구전경입니다.
멍에목 성지는
청주교구(교구장 장봉훈 주교)에서 2016년 8월12일자로 교회사적 의미를 반영, 여러 차례 답사를 거쳐 멍에목 교우촌을 성지로 지정하고,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할 상황이 되지 않아 보은성당에서 교구 신부님들과 많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2016년 9월20일 멍에목 성지 설정 첫 미사 및 부임식 미사를 봉헌하여 명실상부한 멍에목성지가 탄생한 것입니다.
멍에목 성지는 성지가 개발 예정지인데다
안내 표지판도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의 멍에목은 ‘멍어목이’라고도 하며,
윗멍에목(속리산면 구병리)과 아래멍에목(속리산면 삼가리)으로 나뉘어 있으며
19세기에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윗멍에목이고,윗멍에목 마을은
2001년 행정자치부에 의해 메밀꽃 축제를 여는
‘구병 아름마을’로 조성되었으며, 마을 뒤편의 구병산(876m) 중턱에는
한국의 3대 풍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구병산풍혈이 있습니다.
충북의 알프스라고 하는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마음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 멍에목 성지는
1827년 정해박해 때 복자 박경화․박사의 부자 순교
교회사의 기록에 ‘멍에목’이 나타난 것은 1827년의 정해박해 때였다.
이 박해 때 상주 포교들이 앵무당(현 상주시 화남면 평온리 앵무동)
교우촌에 살던 복자 안군심(리카르도)과 김사건(안드레아),
‘상주 멍에목’ 즉 ‘보은 멍에목’에 살던 복자 박경화(바오로)와 박사의(안드레아) 부자를 체포하였다.
이들은 먼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상주와 대구 감영에서의 형벌은 혹독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이후 박경화(바오로)는 형벌로 인한 장독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안군심(리카르도)도 1835년에 옥사하였다.
그리고 김사건(안드레아)과 박사의(안드레아)는 오랫동안의 옥살이 끝에 1839년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다시 멍에목에 모여 살게 된 것은 박해의 위협이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해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공주 땅에 살던 복자 김종륜(루카)이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생활하다가
울산 죽령기(현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로 이주하였다.
박경화·박사의 부자와 김종륜은 2014년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 아래 시복되었다.
1867년 10월에는 청주 포교들이 금봉(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월용리) 마을을 습격하여 멍에목 회장 최용운(암브로시오)의 처남인 맹인 전 야고보를 체포하였다.
이어 다음해에는 서울 포교들이 멍에목 교우촌을 급습하여 여 요한과 최조이 부부, 안 루카, 여규신, 최운흥 등을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상주 장재동(현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장자동)에 피신해 있던 멍에목의 최용운 회장마저 체포하였다.
1867년 청주에서 순교한 전 야고보는 맹인이라고 해서 석방해 주려고 하자 “제가 비록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맹인이지만,
마음으로는 한 결 같이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고 있습니다.” 라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또 1868년의 순교자 최용운 회장은
갖은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교우들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권면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최용운(암브로시오) 회장과 처남 전 야고보는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순교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나는 유일한 ‘하느님의 종’들이다.
최양업 신부가 성사 주고 미사 봉헌한 사목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서한’에 따르면, 이 해에 멍에목 교우촌의 집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모든 아픔을 신앙 안에서 받아들였고, 함께 힘을 모아 교우촌을 재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양업 신부는 교우촌 순방 도중에 멍에목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예비 신자였던 양반 출신 조 바오로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멍에목 신자들은 조 바오로 동생의 위협과 횡포에 시달려야만 하였고, 어렵게 지은 공소 집을 허물고 애써 가꾼 통토를 잠시 버려야만 하였다.
보은 멍에목은 복자 박경화·박사의 부자가 거주하던 교우촌이요,
최양업 신부가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한 공소였다.
그뿐만 아니라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 복자 김종륜, 순교자 최용운 회장과 안 루카, 여 요한 등이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던 천주교 성지다.